피로감

by 김승수

피로감


커다랗고 투명한 둥근 플라스틱 컵에 쨍한 색깔의 컵홀더가 감싸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한눈에 봐도 얼마 전 동네에 생긴 저가 커피 브랜드의 플라스틱 컵이다. 최근 눈에 띄게 커피 컵이 바닥을 많이 나뒹군다. 밤낮없이 사람들이 커피를 마셔대는 탓인지 동네에 카페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주석이‘카페가 이렇게 많으면 장사가 되나?’하며 궁금해하던 찰나, 근처 24시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든 여성 한명이 나온다. 눈이 퀭하다.

“어... 살겠다...”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신 이후 기지개를 펴자 굽어있던 여성의 등이 그제야 숨을 돌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삶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듯 다시 굽어진다.

‘저러면 몸 상하는데...’


주석은 대부분의 사람이 잠에 들어 있는 시간에 홀로 잠에서 깨기 위해 카페인을 수혈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퀭한 눈과 굽어있는 등은 여성에게 숙면을 요구하는 것 같지만, 여성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주석도 한때는 여성처럼 살려달라는 몸의 구조 신호를 무시하고 밤을 새워가며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요한 새벽 유일하게 주석의 곁을 지켜주는 것은 아메리카노였다.

하지만 당연한 일은 없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다. 지금 주석의 곁에 남은 것은 엄지를 치켜세워주던 직장 상사도, 여러 잔 쌓여있던 아메리카노도 아니다. 지금 주석의 곁에 있는 것은 작은 리어카 뿐이다.


그때는 전부였던 것들이 지금은 아무것도 곁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주석은 리어카를 붙잡고 또 다른 골목을 향해 걸어간다. 골목에서 주석은 바닥에 나뒹구는 커피잔들을 주워 담으며 언젠가 여성에게 커피 한잔이 카페인 수혈을 위해서가 아닌 한 잔의 여유가 되길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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