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 세시 칼리 Mar 10. 2024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그 때나 지금이나 첫사랑 얘기는

학교 다닐 때 학년이 바뀌고 새로운 담임 선생님,

새로운 교과 선생님을 만나면 선생님 소개와 함께

질문 있으면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사춘기 순수하고 풋풋한 중, 고등학교 여학생들은 매번 들어도 지겹지도 않은지 늘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새 학년 단골 질문.


"선생님, 첫사랑은 몇 살 때예요?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그런 질문은 대답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도 했지만, 질문을 받는 선생님들의 마음도

말랑말랑한 마시멜로처럼 만드는 것인지, 중년의 남, 녀 선생님들은 물론 교생 실습을 나온 젊은 교생

선생님들의 입가에도 미소를 번지게 했다.


첫사랑이란 단어는 선생님들의 엄격함조차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는 단어였다.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나는 선생님들이 마냥 부러웠다.

그런 얘기들을 실감 나고 재밌게 해 주시는 선생님들을 보며, 나도 선생님이 되면 첫사랑 얘기는 꼭

재밌게 해주고 싶단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영어가 좋아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영어가 좋으니 영어 선생님도 좋았다.

영어 성적도 좋았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영어부장을 했다.

좋아하던 영어 선생님은 마흔 살의 남자 선생님이셨다.


요즘은 미혼; 비혼이라 말하지만 예전에는 노총각이라고 부르던 선생님, 마흔 살의 그 선생님을 좋아했다.


좀 마른듯한 체형에 키는 173~4cm 정도, 얇은 연한 금색테 안경을 쓰셨고, 걸음은 좀 느린 편인

영어 선생님.


수업 시간에는 물론이고 교무실에 영어 문제집 걷어서 가져다 놓으면서 뵙기도 했고, 수업이 끝나면

쫄쫄 뒤따라 나가 말도 붙이고, 편지도 전해드리고, 꽃도 드렸다.

요즘 아이돌 따라다니는 여학생들 마냥 나도 선생님을 많이 많이 좋아했다.


수능이 끝나고 선생님이 공부하느라 고생했다고

친구랑 같이 영화도 보여주시고, 밥도 사주셨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종종 안부 전화를 드렸었는데

학교 생활하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선생님께 자주 연락을 못 드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죄송한 마음에 더 연락을 못 드리고,

안부 전화도 점점 못 하게 되고 급기야 연락 거의

못 드리게 되던 찰나


독문과에 진학한 친구가 고등학교에 독일어 교생실습 나갔다가 들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좋아하던 영어 선생님이 행방불명이 되셨다는 거다.

어느 날 출근을 안 하셨고, 학교 근처에서 살고 계셨기에 다른 선생님들이 집으로도 찾아가 보았지만

집에는 안 계셨고, 그 후로 종적을 감추셨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내가 그때 선생님의 나이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종종, 어쩌면 자주 선생님 생각을 한다. 영어 공부를 할 때도, 친구와 고등학교 이야기를 나눌 때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배웠던 팝송이 어디선가 들릴 때도.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결혼은 하셨을까?'

'선생님 이메일 주소가 있었는데, 잘 적어둘걸.'


'은사님 찾기'로 검색해 들어가 본 사이트에서 선생님 성함을 검색해 보았지만, 개인 정보 공개에 동의한 선생님들만 검색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 등교시키고 집으로 가던 길.

오전 8시 45분경.

집으로 가는 큰 대로변 우측에 난 짧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에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그 영어 선생님과 너무 닮은 한 남자분을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마주 보게 되었다.


시력이 그리 좋지 않기에 그분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다.

느낌만 비슷하게 보였다.

'설마 진짜 선생님이실까?'

"혹시 OO여고 영어 선생님이셨던 OOO 선생님 아니신가요?"

여쭤볼까? 빨간색 신호등에서 초록색 신호등으로 바뀌기 전까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으니 선생님 나이는 벌써 60대이실 거고,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계신

저 남자분의 나이도 60대 비슷한데..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빨간색 신호등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걸음을 뗐다.

나는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선생님과 비슷하게 생긴 그분은 마스크를 끼고 있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때의 얼굴을 갖고 있던가?'

'마스크를 벗고 있었다면 선생님이 알아보셨을까?'

'내 이름은 기억하실까?'

'말을 걸어 볼까?'


우리는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그분이 횡단보도를 다 건너 나의 뒤편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결국 여쭤보지도 못하고 각자 가는 길을 갔다.


사실 여쭤볼 수도 있었을 거다.

내가 그렇게 후줄근한 옷차림이 아니었다면,

화장이라도 좀 더 예쁘게 하고 나왔더라면


난 그날 내 모습에 자신이 없었다.

20년 만에 만나는 좋아했던 선생님과 그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집에 와서 친구에게 전화해 그 이야길 해주었더니, 아마 그 선생님이 아니었을 거라고 했다.

정말 아니었을까?

만일 맞았다면...






다음 날 나는 선생님일 수도 있는 그 남자분을 만났던 그 비슷한 시간에, 그 횡단보도에서 20분 정도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서 있었다.

그분이 다시 그 길을 지나가지 않을까,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꼭 선생님이 아니신지 여쭤보겠다고 생각하면서.


논술 공부방을 하게 되면서 가끔 아이들이 첫사랑 얘기를 해달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첫사랑의 기준이 뭔지를 아이들에게 되묻기도 한다.

"첫사랑이 짝사랑도 포함되는 걸까?"

"진짜 처음 연애를 했던 사람이 첫사랑인 걸까?"


<첫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처음 느끼거나 맺은 사랑'이라고 되어있다.

그럼 내 첫사랑은... 영어 선생님이었던 걸까, 아닌 걸까?










이전 09화 드디어 오후 세시, 앙버터 공부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