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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순 Oct 26. 2024

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18)

재이

  의사가 말했다. 기록해 보라고, 기억을. “우울증 알죠?” 안다고 대답했다. “지금 겪는 게 사실 같은 거예요.” 결벽증과 우울증, 둘을 연결해 본 적은 없다. “선생님, 저는 우울해 본 기억이 없어요.” “정말 그럴까요.” 아마 내가 네, 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하게 된다면 우리 둘 사이에 아무런 영양가 없는 공방전이 오가게 되겠지, 하고 유추했다. 내 생각을 읽어낸 건지 의사는 입을 열었다. “우울감은 정신이 피로한 거지만 우울증은 온몸이 아픈 거예요. 기억을 꺼내 써 봐요. 그리고 편린이라 생각하고 버려요. 머릿속을 청소한다는 기분으로.” 노트를 펼쳤다. 재이가 준 샤프를 꾹 쥐고 쓰는 대신, 한 시간 이른 나라로 떠난 재이가 한 시간 늦은 곳에 있는 내게 돌아올 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재이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봄볕이 통유리를 통과했다. 벚나무가 도열한 보도블록을 내려다보다 나는 봄이 주는 명암에 대해 떠올렸다. 지나치게 밝아 한편으로 지나치게 어두워진 단면과 윤곽들. 졸업 후 이경과 렘브란트 반 레인의 전시회를 찾았다. 광택감이 없는 블랙 슈트 차림의 큐레이터는 얇은 라펠에 작은 핀 마이크를 끼어둔 채 그늘진 작품들 앞을 느릿느릿 거닐며 꼼꼼히 소개했다. 큐레이터가 발을 쉼, 뗄 때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따라 움직였다. 이 무리 속에 나와 이경도 있었다.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로 불립니다.”


  검지에 빛바랜 은색 판도라 링을 낀 큐레이터가 7피트짜리 금빛 액자 앞에 멈춰 서서 가리켰다. 납이 발린 캔버스 위 그림의 면에는 밝은 빛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쏟아져 내렸다. 큐레이터의 손끝이 빛의 기점을 가리켰다. 그 빛은 아람어로 써진 글자였다. מנא מנא תקל ופרסין. 그림 속 하얀 터번을 두른,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왕관이 얹힌 바벨론 왕 벨사살의 경악한 눈짓과 주위로 온갖 휘황스러운 보석을 두른 여인들의 창백한 낯빛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 안에서 그들은 환히 쏟아져 내리는 빛을 받고 있다. 성전에 사용된 그릇들이 탁자 위로 놓여 있다. 그날 밤 베사살은 죽임을 당한다. מנא מנא תקל ופרסין는 당신은 왕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 정도로 해석된다. 렘브란트의 이 그림은 다니엘서 5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고 큐레이터는 자신감에 찬 얼굴로 자신을 둘러싼 무리의 사람들을 빙 둘러봤다.


  “이 빛은 가르침, 성스러움, 고결함을 담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림에 쓰인, 빛이 쏟아져 내리는 מנא מנא תקל ופרסין로 향해 있을 때 나는 겁에 잔뜩 질린 벨사살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다음 작품은 서른네 살의 렘브란트 자화상이었다. 큐레이터가 작품을 해설할 동안 이경은 내 귀에 대고 노안이다, 보정이 필요하다, 아니 자기가 자기를 그린 거니 실물보단 낫게 그렸겠지, 하며 피식댔다. 어느새 나도 따라 웃었고, 사실 웃겨서라기보다 내 귀에 닿는 이경의 숨소리가 간지러워서였다. 왜 웃음이 터졌는지 영문도 모르면서 이경은 나를 따라 다시 웃어댔다. 빛의 화가가 아니라 필터의 화가잖아. 우리는 고상한 큐레이터와 무리를 버려둔 채 렘브란트가 숙고 끝에 완성한 작품들 사이를 아무렇게나 헤집어 다녔다. 하나의 그림을 지나칠 때마다 몇 해가 지나갔다가 돌아오고를 반복했다. 1659년, 1665년, 1663년, 1632년, 1669년, 액자 아래 부착된 아크릴 팻말들 속 연도가 따라 움직였다.


  우리는 전시장을 나와 대리석 바닥으로 된 로비 창가에서 벚나무가 도열한 보도블록을 내려다봤다. 이경은 봄볕이 내리쬐는 통창 앞에 놓인 장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햇살을 뚫고 소나기가 우두두 쏟아졌다. 유리창에 드문드문 빗방울이 맺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빗방울에 투과된 햇빛이 산란하며 로비 안으로 봄볕을 옮겨왔다. 여우비, 이경이 되뇌었다. 산란하는 조각조각 빛깔들은 날카롭게 내 뇌리를 치며 대학 시절을 그대로 뚫고, 다시금 나를 태우고 지난날의 나를 앉혀둔 채 밸런타인데이가 지난 뒤 소개팅이라니, 하며 빙수에 알알이 박힌 딸기만 파먹던 재이를 기억에서 데려왔다. 재이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우리 둘 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취업에 실패한 무직자이긴 했지만 재이는 많고 많은 기회를 마다하고 오로지 몇 안 되는 항공사 채용 면접에만 몰두한 거라 나와는 사정이 달랐다.


  “좋겠어요. 화이트데이에 선물 받을 거라.”


  훗날 재이가 알려줬다. 저 한마디가 숙고 끝에 내린 최대의 애정 표현 ̄요즘 말로 하면 플러팅 ̄이었다고. 나는 말도 안 된다며, 너 얼마나 무례했는지 알고 있었냐며 타박했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의 재이를 다시 데려올 순 없어 맥이 빠졌다. 당시 우리는 카페를 나와 찾은 극장에서도 실랑이를 벌였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가 보고 싶다고 내가 칭얼대자 재이는 냉정하게 상영시간이 오십 분 남짓 남은 데다 분명 지루해서 팝콘만 먹다 잠들 거라며, 울버린의 마지막 감동 이야기인 「로건」을 봐야 한다고 설득했다. 나는 영웅주의가 싫었고 무엇보다 소개팅 자리에서 마초맨 휴 잭맨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포스팅 된 작품을 보고 싶진 않았지만, 어느새 나는 4관 E열 11번 자리에 앉아 있었다. E열 12번 자리에 앉은 재이는 눈치 없이 내 가슴께에 둔 팝콘 컵에 손을 쑤셔가며 부스럭거렸다. 봄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쌀쌀했고 밤하늘은 차가워 내 눈꺼풀 위로 결정이 얹어진 듯 무거웠다. 재이는 졸지 말라며 내 귀에 입을 대고 자꾸 속닥거렸고 내가 고개를 틀어 째려봤더니 콜라를 들이밀곤 멋쩍어했다. “이제부터 재미있어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찾은 술집에서도 재이는 물어봤다. “재밌었죠?” 나는 수박주를 한 모금 삼킨 뒤 수박 씨앗처럼 단단히 응집된 진담을 입 밖으로 툭툭 뱉어냈다.


  “재미는 무슨, 너 알지? 싸가지 없어. 은근 반말질이야, 왜.” 나는 취했고 분이 가시질 않아 단정하게 묶고 온 머리칼을 헝클었다. 이후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와 택시에 탄 기억은 있는데 그다음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이른 아침에 깨어나 폰을 켰더니 길다고 하면 긴 사과 메시지 두 통과 추신으로 애프터가 들어와 있었다. 글피에 우리는 다시 만나 「파도가 지나간 자리」를 봤고, 또다시 술을 마셨다. 재이는 또다시 취한 나를 바래다주었는데 할증 붙은 미터기가 육천삼백원을 가리킬 때 택시를 황급히 세웠다. 육천삼백원이 전재산이야, 하고 재이가 터덜댔다. 두 코스를 앞두고 내린 우리는 잰걸음으로 집까지 걸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를 뚫고 발끝까지 찌릿 내려가 벼락을 맞은 피뢰침처럼 온몸을 달달 떨렸다. 그사이 재이는 챙겨온 팩소주에 빨대를 꽂았다. 빨대를 문 재이를 빤히 올려다봤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균적인 신장,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피부, 완만한 등고선을 그리는 부드러운 이목구비였고, 그래서 편한 인상에 속했고 자꾸 훑어보다 보니 승무원이란 직업과 꽤나 잘 어울렸다. 나는 몸을 휘청대며 횡단보도 앞 볼라드에 엉덩이를 붙였다.


  “파란 눈.”


  노란 가로등 빛을 받자 더욱 짙어진 재이의 눈동자가 보였다. 안광, 아니 안. 빛을 받자 모든 빛이 빨려 들어가 더욱 짙어졌다. 한번 떠올려본 적 없던, 교수의 말로만―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 듣던 ‘창백’이란 단어가 난생처음 안개를 뚫고 나타났고 그러자 조금 슬퍼졌다. 내가 어깨를 부르르 떨자 재이는 두 팔을 벌려 내 두 팔뚝을 꾹 잡았다. 놀란 내가 재이의 손을 밀쳐냈고 다시금 눈을 뜨니 나 혼자 자취방에 누워 있었다. 분명 같이 있었던 거 같은데 폰을 켜 보니 새벽 세시였고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조지 칼린 같아.”


  말을 놓기로 한 적이 없지만 취했다는 핑계로 나는 말을 놓았다. 재이는 억울한지 내가 조지 칼린이라고? 입만 산 논리주의자란 거야? 하며 내가 묻지 않은 말들까지 장작을 태우듯 다다다 우리 둘 사이에 놓인 화로로 던졌다. 왠지 이 방이 조금 따뜻해진 기분이었다. 재이는 자기가 승무원이 되고 싶은 이유를 털어놓았다. 여러 국가를 오가며 무국적자의 기분으로 살고 싶다는 것과 뜬금없이 객사를 꿈꾼다는 것. 객사가 꿈인 남자를 어떻게 좋아해? 하곤 나는 정작 재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파란 눈. 너무나 파란 눈. 뭐가 우스운지 재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세워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네가 생각해도 우습지? 조지 칼린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그거 객사잖아.”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고, 조지 칼린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사실을 이날 처음 알게 되어 슬펐다. 이후 취기가 올라서인지 재이가 뱉어낸 말들을 가만히 듣기만 했고, 이 방 안에 부유하는 미립자들이 내 귓구멍 속으로 밀려 들어와 고산지대에 오른 듯이 몽롱하고 멍멍했다. 마지막 말은 기억한다. 잘 자라, 내일 보자. 나는 그대로 눈이 감겼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고 나른함과 평온함이 동시에 밀려왔고 이안류에 빨려든 것처럼 평안했다. 밥그릇에 시리얼을 붓는 동안 재이한테 띠링, 하고 연락이 왔다. 오늘 달이 뜨기 전에 보자며. 왜요? 하고 내가 높임말을 쓰자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전해졌고 만나보면 알게 될 거라며 괜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삼 년 만의 개기월식을 앞둔 날 나는 보라매공원에 갔다. 봄, 이란 단어가 군데군데 노랫말로 쓰인 노래들이 스피커에서 소리 입자가 되어 흘러내렸다. 조경 나무에는 ‘대실 15000원’이란 현수막이 묶여 있었고 야광 띠를 두른 공무원들이 어귀를 돌아다니며 그것들을 철거했다. 대실에서 숙박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현수막 앞에서 나는 재이가 사준 분홍 솜사탕을 오른손에 쥐고 왼 손톱으로 당겨 입안에 넣어 녹였다. 솜사탕이 줄어드는 양만큼 지구의 본그림자에 가려진 달이 붉어갔다. 내게 낭만이 마른 건지 붉은 달을 구경하는 재미보다 재이의 눈동자를 훔쳐보는 게 더욱 좋았다. 그래서 재이의 머리 뒤로 뜬 붉은 달을 피해 그 아래 파인 재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부담스러운지 재이가 고개를 틀었고 나는 그만치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장의자에서 일어난 이경은 그래서 다음은? 하고 놀이동산에 놀러 온 아이처럼 순구한 얼굴로 내 뒤를 졸졸 따랐다. 우리가 예술의 전당을 나와 걷는 동안 다시금 비가 쏟아졌다. 늑대비, 이경이 말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젠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선술집에서 새우어묵까스, 오징어볼, 어묵고로케, 어묵초밥, 파프리카말이가 한 접시에 담긴 모둠 세트 메뉴와 데운 사케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나는 원피스에 두른 얇은 가죽 벨트를 한 칸 풀었다. 새우어묵까스 두 조각과 오징어볼, 어묵고로케, 파프리카말이를 찔끔 남겼다. 밍밍하게 식은 사케는 거의 입에 대질 않았다. 미닫이문이 여닫치는 소리와 함께 새로 밀려들어 온 손님들은 빈자리가 없는 홀을 훔쳐보며 출입구매트 위에서 서성이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두건을 두른 종업원은 주방에서 나와 파란 우산꽂이를 입구 앞에 비치했다. 장우산들이 금세 빼곡히 꽂혔다. “그만 일어나요.” 재이와 나는 선술집에서 나왔다. 밤하늘에 내리는 빗줄기가 땅에 닿자 납작하게 스몄다. 작은 접이식 우산 안으로 서로를 껴안은 연인 몇 무리가 우리 옆을 지나쳐갔다. 선술집 맞은편에는 파라다이스모텔이 있었고 몇몇 연인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리는 큰길에서 헤어졌다.


  며칠 뒤 심도림역에서 재이를 다시 만나 여의나루역으로 갔다. 그리고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를 걷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난간에 가슴을 대고 완연히 떠오른 왼편의 달을 쳐다봤다. 붉은 기가 다 벗겨진 채로 노랗게 녹슬어 있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깬 듯이 명료했다. 목적지인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았고 우리는 스칸디나비아 접시에 담아놓은 먹물파스타와 안심스테이크를 먹었다. 이제야 진짜 소개팅을 하는 기분이네요, 하고 내가 추임을 넣자 재이는 인제 그만 정식으로 말을 놓자며 반말로 말했다. 그리고 나이프를 들어 할로겐 전구가 쏜 빛에 반짝 비춰본 뒤 스테이크를 썰며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첫날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격을 차리고 있는지 나도 몰랐을 것이다. 하늘은 밤이 별을 먹은 건지 온통 어두컴컴했다. 나는 다음 주에 이경과 렘브란트의 전시회를 갈 거란 사실을 말해주었다.


  “빛의 화가라던데 난 어둠의 화가라고 생각해.”


  우리는 여의도공원에 있었다. 야광 바퀴가 굴러가는 롤러스케이트를 탄 아이가 어둠 속에서 원을 그렸다. 노랑, 파랑, 주황, 초록 불빛 들이 뒤섞여 둥근 오로라를 바닥에 긁고 어둠이 삼킨 별들을 토해냈다. “광전 효과, 뭐 그런 거지.” 재이는 빛은 곧 어둠을 내포하고 있고 태초에 빛이 있기 전에는 어둠만 있었다며 중얼거렸다.


  “그럼 어둠 전엔 뭐가 있었는데?”“어둠 전에는 어둠만 있었지. 빛과 달리 어둠은 공간이 필요치 않거든.”


  우리 둘 다 잠시간 눈을 감았고 어둠이 끈적하게 채워졌고 아이들의 깔깔대는 알파벳 웃음소리가 귀로 흘러들어오자 어김없이 어둠 뒤에 숨은 양양을 불러냈다. 주선자는 이경이었다. 정작 본인은 누구와도 연애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더는 맞기 싫어서? 모든 남자가 그놈처럼 폭력적이진 않아, 하고 충고를 해줄 수 있었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예술의 전당에서 나온 우리는 대창구이가게로 가 소주를 세 병이나 비웠다. 세 병 중 두 병은 이경의 몸속에 머물다가 나왔다. 양변기 속에 머리를 박고 구역질하는 이경의 등허리를 두드려줬다. 더럽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굳이 더럽다면 토사물보다 물풀을 짜는 듯한 끈끈한 소리였다. 안주는 입에 대지 않던 이경의 입 밖으로는 끈끈하고 맑은 물풀 같은 액체만이 뚝뚝 떨어졌다. 이경은 흰 양변기를 짚고 일어나 비틀대며 테이블로 돌아가 앉은 뒤 내가 꺼낸 재이와의 소개팅 이야기를 두고 낭만이 얼마나 무책임한 건지 한참 궤를 늘어놓았다. 그 절반은 친언니에 대한 궤로 이어졌다. 자꾸 듣다 보면 이해보단 언니의 처량함과 패배감만 내게로 스미어 순간 우리 모두가 여자라서 불행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 나는 불행하지 않고 이경 너도 불행하지 않고 언니 역시 불행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언니는 퀘벡으로 떠났고 그 후로 이경과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자정을 앞두고 대창구이가게를 나온 우리는 신호등 앞에서 파란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우리 언니는, 우리 언니는 말이지, 하며 밤공기에 알코올 냄새를 섞은 이경이 먼지 쌓인 부전함 위로 손을 짚었다. 빨간불에서 노란불로 점멸하자 차들이 일제히 속력을 올려 횡단보도 위를 빠르게 가속해 지나쳐갔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서울고등학교 부근에서 택시를 잡았다. 할증 붙은 미터기가 육천삼백 원을 가리킬 때 택시가 멈춰 섰다. 봄에 다다른 새벽은 아직 차갑고 날카로워 피부를 할퀴었다.


  이후 재이와 꾸준히 만났고 진전 없이 흘러갔다. 둘 다 취업에 실패해서인지 용기가 없어서인지 서로 고백하지 못했고, 이 두 가지는 결국 한 가지로 이어져 취업을 못 해 둘 다 용기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나는 서류 면접에 또 떨어졌고, 재이는 이번에 취항한 저비용 항공사 채용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붐이었다. 새로운 항공사들이 자고 일어나면 생겨났고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떠나려는 수요가 연일 최다를 갱신했는데 나와 재이는 일평생 해외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라오스나 베트남에 대해 자주 열망했고 둘 다 쌀국수와 탄두리치킨을 좋아했다. 따지자면 재이와 달리 나는 용기보다 체면이 없었다. 가끔 그 체면이 연민으로 둔갑하기도 했고 결국 이경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간 소개팅 자리였지만 내가 대학 시절 저지른 일들은 재이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양양이 생각나 내가 가지고 놀던 다마고치의 아기공룡에 대해 떠들었다. 그러면 재이는 언젠가 돌아올 거야, 하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게 대답했다.


  완연한 봄이었고 초여름 열기가 쌈지길에 스며있었다. 재이와 느린 바람을 함께 맞으며 양꼬치도 꿀타래도 자몽에이드도 절반씩 나눠 먹었다. 인사동으로 몰려든 인파에 떠밀린 우리는 빠르게 돌아 저녁 문턱, 여섯 시에 멈춰 섰다. 인도요리전문점에서 감자, 완두, 다진 고기를 만두피 속에 채워 넣은 사모사와 각종 싸한 향신료를 곁들인 탄두리치킨 그리고 누릿한 인도 맥주를 건배사와 함께 마셨다. 해가 떨어지자 식은 바람이 불었고 테라스에서 길거리공연을 관람했다.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하얀 원피스 차림의 첼리스트는 스탠드바 의자에 앉아 묵묵히 연주했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던 내 시선엔 석고 동상처럼 여겨져 그녀의 신체 일부가 움직일 때마다 부서지고 금이 가듯 불안정해 보였다.


  “나 최종 면접에 붙었어.”


  재이가 그 금을 깨며 나를 쳐다본 뒤 문득 사귀자며 고백했고 내가 꿈꿔온 것과는 달리 우리는 싱겁게 연인이 되었다. 좋아한다는 말만큼은 선수 치고 싶어 좋아해, 하고 내가 황급히 꺼내자 재이는 자기 역시 좋아한다며 내가 세운 명제를 넘어서거나 무너트리는 대신 우리란 감정의 벽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그럴 때마다 정연 선배가 스쳐 지나갔다. 한때 우리가 함께 쌓아 올렸던 그 피라미드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는 과정이 이토록 느슨하면서도 끈끈하고 정교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고 놀랐다.


  밝게 떠오른 달 아래 바람 속엔 서늘한 바늘이 숨겨져 내 맨살을 찔러 아렸고 드러난 팔등과 목선으로 닭살이 돋아났다. 아마 내일 비가 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르막이 끝나는 내리막길에는 조명가게들이 도열해 있었다.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며 이야기를 바닥에 떨어트려 굴려 보았고, 그러자 우리의 걸음보다 몇 발치 앞질러 가서 몇몇 대화의 주제는 놓쳐버렸다.


  “겁쟁이는 좋은 거 같아.”

  “왜?”

  “상대한테 용기를 주잖아.”

  “에, 좀 이상하다.”

  “잘 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주는 거야.”


  이상한 논리지만 먼저 고백한 재이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된 건 사실이었다. 최근 이경을 통해 알게 된 이명호 사진작가의 사진들을 검색해 보여주었다. 푸른 소나무 뒤로 장막을 설치해둔, 오로지 나무 한 그루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사진들. 꼭 재이가 내 앞에 서 있을 때면 그 뒤로 장막이 쳐진 듯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재이는 말했다. 사진을 잘 찍고 싶다면 사진 속 사진을 봐야 한다고. 반대로 사람을 잘 알고 싶으면 사람을 봐서는 안 되고 사람 속 사람을 봐야 한다고. 그제야 아주 조금 이해가 되어 나는 더욱 슬퍼졌다.


  “즉, 찍는 사람이 중요해.”


  즉, 이란 부사를 자주 썼다. 재이가 즉, 이란 부사를 무심코 붙일 때면 우리의 관계가 환기되거나 반대로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재이의 논리 앞에 나는 무척이나 쉽게 바스라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한 나는 술에 취한 이경을 소파에 눕히곤 시침을 쳐다봤다. 시침은 가장 높은 곳에서 이제 아래로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개의 방이 딸린 오피스텔이었다. 집들이 때 들르긴 했지만 티브이다이에 티브이가 없는 게 여전히 어색했다. 티브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물감이 흩뿌려진 작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집들이 때 잭슨 폴록, 하고 이경이 알려주었고 잭슨 볼록? 하며 나는 내 배를 내려다봤다. 나는 소파에 널브러진 이경을 내려다본 뒤 부엌으로 건너가 물을 꺼내 마셨다.


  이경의 언니는 크리스마스에 파혼했다. 약혼자는 노트르담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국 유수 벤처기업에서 외교사로 근무했고 언니가 일하던 회사 근처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게 아마 이 년 전이었고, 한강에 떠다니던 유람선에서 보타이를 맨 그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먼저 약혼을 치렀는데 출장을 떠난 남자가 돌연 잠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다시 만난 건 식장이 아니라 경찰서였다. 언니는 여전히 깔끔한 외모와 멀끔한 정장 차림인 그 남자 앞에 다가가 물어보았다. 도대체 왜 날 속였냐고. 남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정말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고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맞잡았다. 언니 외에도 그곳에는 다섯 명의 피해 여성이 한쪽 구석에 차례로 앉아 있었다. 금전적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다. 형사는 협박성 성관계를 가졌는지 물었고 이 역시 서로 동의하에 했기에 조서에는 사실 그대로 기록되었다. 혼인빙자로 고소한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 여성과 언니는 남자에게 이것만 추궁했다. 왜 속였냐. 왜 도망갔냐. 왜 청혼했냐. 정말 사랑했냐. 이상하게 언니와 다 엇비슷한 시기에 사귀었고 청혼에 승낙하자 잠적했다.


  이경은 가끔 둘이 있을 때면 남자가 무섭다고 말했다. 남자가 싫은 게 아니라 무섭다고. 이 세상에 정말 나쁜 여자도 많겠지. 정말 나쁜 여자들이 나쁜 짓까지 벌이겠지. 근데 나는 남자가 무서워, 하고 양변기를 짚고 일어나 휘청거리던 이경의 조금 전 모습을 떠올렸다. 이경은 소파에 누운 채 새근대며 자고 있었다. 모든 나쁜 놈이 이경과 그의 언니에게만 달라붙은 걸까. 이경은 자기가 남자에게 당한 폭행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래서인지 대학 시절의 이경을 똑똑히 기억하는 나는 타인들이 이경을 두고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면 화가 치밀었다.


  “내가 머리칼이 짧아서 면접에서 떨어지는 걸까?”


  농담으로 꺼낸 이야긴데 며칠 뒤 페미니스트라 면접에 떨어트렸다는 내부 고발 기사가 실렸다. 언니가 경찰서에서 조서를 쓰고 돌아온 며칠 뒤 자신의 사건이 기사화된 걸 확인했고 그 밑으로 댓글이 수천 개나 달려 있었다. 제일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은 이랬다. ‘취집하려다 실패했네.’ 그다음으로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은 이랬다. ‘돈 많다고 하면 한녀들 사족을 못 써.’ 그 밑으로는 ‘잘 대주네.’ ‘쟤들도 똑같아. 끼리끼리.’ ‘정직하게 만나서 결혼해라. 미친년들아’ ‘갈보들.’ ‘딱 봐도 돈에 미친 논현동 빌라촌 성괴년들.’ 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경찰서에 함께 있던 피해자 중 한 여성이 기사가 난 직후 욕조 샤워기로 목을 감아 자살했고 이것 역시 가감 없이 기사화됐지만 댓글란은 막혀 있었다. 언니는 그 헤드라인을 한참이고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이민을 결심했다. 이경은 이렇게 말했다.


  “그 남자가 죽인 게 아니야. 저 새끼들이 죽였어.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그냥 사람이 싫어졌어.”


  이경과 나는 다음 날 북국으로 해장했다. 이경은 지난밤 우리가 나눈 대화가 기억나지 않는지 아무렇지 않게 재이에 대해 물었고, 나는 그 남자가 좋아졌다는 사실만 짤막하게 전달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재이는 남자가 아닌지. 그리고 나는 사람이 아닌지. 재이라서 괜찮고, 나라서 괜찮다면 너도 다른 남자, 다른 사람이라면 괜찮아지지 않겠냐고.


  내리막을 다 내려온 우리는 다시 뒤돌아 걸으며 한낮에 없던 가판대와 그 위로 진열된 크롬 반지나 목걸이 등 도금된 액세서리들을 구경했다. 재이는 오 분 간격으로 멈춰 서서 고양이카페, 아트박스, 스티커사진기로 내 손목을 잡아끌어 들어갔고, 나는 오 분 간격으로 잡힌 손목 위로 돌아가는 분침을 슬며시 들여다봤다. 분침은 잘게 부서지며 흘러갔다. 막차가 떠난 버스정류장에는 택시들이 일렬로 늘어서 아쉬운 얼굴들을 태워 달아났다. 어두웠지만 거리는 여전히 밝게 붐볐다. 연인들이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은 작별과 맞닿아있는 전철 없는 승강장 같았고, 나와 재이는 후미등을 밝힌 택시에 함께 올라탔다. 할증 붙은 미터기는 빠르게 올라갔고 우리 역시 아쉬운 마음이 커져 두 정거장을 앞둔 채 내렸다.


  우리는 새벽 공기가 내려앉은 빈 거리를 걸었다. 집 앞에 다다른 나는 쌈지길에서 재이가 사준 크롬 반지를 약지에 낀 채 손을 흔들어 배웅했지만 우리는 결국 헤어지지 못했고 다시 함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둘 다 침대 아래 깔린 러그에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 지난번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가 보고 싶은 곳 있어?” “우주. 지구가 정말 둥근지 궁금해. 너는?” 재이는 얼마간 숨을 참다 뱉으며 말했다. “에버랜드.” 소박하다, 하고 나는 무심하게 소형 냉장고에서 브레첼을 꺼내 왔다. 차갑게 굳은 걸 반으로 쪼개 나눠 씹다가 어느새 같이 씹었고 함께 손끝을 맞댄 채 잠이 들었다. 해가 떴고 우리는 아침밥을 같이 나눠 먹었다. 창을 뚫고 들어온 뭉뚝한 햇살에 내가 지닌 감정이 차갑게 느껴졌고 사랑해, 란 단어를 처음 뱉어보았다. 재이의 쌍꺼풀이 활시위처럼 휘어져 내게 쏘아 눈을 멀게 했다. 우리는 밥을 삼키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반찬 삼아 서로 돌아가며 주고받다가 웃음이 터져 다시금 침대 위로 향했다.


  “이상하지 않아?”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나는 내 아랫배에 난 물결 자국들을 가리키며 재이에게 물었다. 재이가 나를 껴안으며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포근하다, 정말” 정말이지 이상한 대답이었다.


  언니의 체구는 아담했고 링이 검지를 감싸고 있었다. 이 링은 괌으로 여행을 갔을 때 면세품으로 사 온 거라고 남자에게 일러주었다. 남자는 깔끔한 차콜그레이 슈트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커피를 앞에 두고 첫눈에 반했다, 같은 번하고 매력 없는 고백 대신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찬찬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부족하지만 마음을 받아달라며 고백했다. 언니와 남자는 카페를 나와 극장에 갔다. 언니는 두어 번 졸다가 악당이 쏜 총소리에 놀라 자기가 총격을 당한 주인공처럼 화들짝 깨어났고 남자가 놀란 언니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진정시켜 주었다. 둘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모든 연인의 시작이 그렇듯 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서로가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이야기했다. 언니가 머뭇대자 남자는 초등학교 때 배운 리코더로 타이타닉 주제가를 연주할 자신이 있다며 언니의 웃음을 훔쳤다. 이후 남자는 자신이 졸업했다는 노트르담 대학교에 대해 장황하게 회상했다. 둘에게 노트르담은 너무나 멀어 구로리공원을 걸었다. 저녁이 밤이 되어가는데 아이를 데려 나온 부모들은 집으로 돌아갈 기미가 없어 보였다. 남자아이들은 킥보드나 네발자전거를 몰고 여자아이들은 인형이나 풍선을 쥐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를 좋아하는지 물었고, 언니가 자기 눈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문 남자아이를 바라보며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책임져야 하니까.”


  언니의 이야기를 다 들은 재이가 말했다. 그 책임을 남자만 지는 건 아니라고. 나는 양양이 생각났다. 다시 양양이 생각났고 가여웠다. 재이에게 말할 용기가 더욱 나지 않았다. 내가 용기를 내지 않으면 재이는 언제나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둘의 기억 안에서나 통한다. 한 번씩 불쑥 양양에 대해서 말하긴 했다, 너무나 그리워서. 재이에게 양양에 대해 떠들고 나면 채워진 수갑이 의도치 않게 풀린 것처럼 일시에 해방감이 몰려왔다가 결국 나를 더욱 조여 맸다. 우리는 자주 여의도공원이나 서울숲공원이나 한강을 찾았다. 분명 나는 우울해야 하는데 재이와 함께 촬영한 사진들을 보정할 심정 여유가 있고 행복한 순간을 행복하게만 기억할 이기심이 있었다. 속물이란 단어가 목젖까지 밀려왔고 모두가 나처럼 위선적으로 살아간다며 침과 함께 삼켜 내려보냈다. 나는 위선 없이 재이를 사랑한다고 치장했고, 아무런 문제 없이 사랑하던 우리는 재이가 최종 면접에 합격해 승무원이 된 날 처음으로 다퉜다.


  재이와 다투고 집에 돌아온 뒤 나는 아침, 점심, 저녁밥을 먹고, 다시 다음 날 아침, 점심, 저녁밥을 먹은 뒤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날 밤 우리는 화해 없이 청계천을 찾았다. 어둠을 탄 물결로 금빛 그림자들이 흐물흐물 흘러갔다. 막 점등식을 마친 연등축제가 한창이었다. 동자승과 스님 들은 광교 위에서 목탁을 두드렸고, 그 옆으로 용과 흰 코끼리, 석가모니불, 거북선, 연꽃, 갑옷을 입은 장군, 잉어, 붕어 등을 형상화한 구조물들이 오색 빛을 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학생으로 보이는 남녀들은 꽹과리, 장구, 징, 북을 들고 대형을 갖춰 부산을 떨었고, 한 대의 구급차가 인파에 묶여 경적만을 요란스럽게 울렸다. 건물들은 일제히 차단기를 내려 밤하늘 아래 청계천이 불타는 깃털처럼 느릿느릿 하릴없이 떠다녔다. 나는 축축한 손을 폈다가 재이의 손을 다시 움켜쥐고 이차선 도로를 점거한 용의 구조물을 흘겨봤다. 길고 가느다란 수염과 초록 비늘이 어둠의 영역을 허물어 광채를 뿜어냈다. 다양한 구조물은 별 하나 뜨지 않은 밤하늘 아래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모든 풍경이 휘황했는데 무색한 인파와 섞이자마자 상쇄되었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다그치는 중년 여자의 신경질 배인 목소리, 표준어와 사투리를 오가는 늙은 남자의 통화 소음, 선글라스를 쓴 젊은 여자의 누런 치아와 다투거나 싸우거나 걷거나 서 있거나 형광 머리띠를 낀 여자아이를 목말 태운 젊은 남자나, 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사람이 이 축제와 하나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언니와 남자는 구로리공원을 두 바퀴 천천히 돌았다. 그동안 서로의 취미에 대해 공유했다. 오래달리기와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청바지 찢는 건 말이에요, 하며 숱가위를 쓰면 예쁘게 모양낼 수 있다는 잡담까지 나눴다. 청바지가 많아요? 주머니에 손을 감추며 언니가 물었다. 청바지보단 슈트가 많죠. 주말이 있잖아요. 주말에 청바지 입고 자라고요? 아니, 아니 청바지 입고 나가야죠. 어디를요? 어디든…… 경복궁도 있고, 덕수궁도 있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궁에 가라고요? 궁에 가요, 우리, 하고 언니가 용기 내어 말했다. 남자는 언니를 바래다줬다. 구로리공원을 나와 둘은 대림역 사거리 쪽을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불을 밝힌 쇼윈도에 아장대던 새끼강아지들도 구경했다. 포메라니안, 치와와, 시추였다. 혼자 살고부터 강아지에 욕심이 난다고, 포메라니안이 있는 칸의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며 언니가 미소를 지었다. 자취하면 힘들지 않아요? 허리를 숙여 남자가 물었다. 외로운 게 더 힘들어요. 허리를 편 언니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뒤따르며 남자가 언니와 발소리를 맞췄다. 대림역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서서 둘은 파란불을 세 번이나 묵고한 뒤에야 간신히 작별인사를 나눴다.


  예약해 놓은 일식집에 들어갔다. 장어, 참치뱃살, 단새우, 연어, 도미, 피조개, 계란 초밥이 컨베어벨트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고 빨간 두건을 두른 직원이 다가와 예약자명을 확인하곤 폭이 좁은 계단을 가리키며 우리를 안내했다. 폭이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더 폭이 좁은 복도가 나왔고 목조로 된 일본식 방문들이 양옆으로 흔극을 두고 정렬돼 있었다. 직원은 육 번 방문을 열어 두 손으로 좌식 테이블을 가리켰다. 좌식 테이블에 앉아 우리는 창밖으로 철로 된 흰 코끼리가 느릿느릿 지나가는 광경을 지켜봤다. 코끼리가 다 지나간 뒤 나는 승무원이 된 걸 축하한다며 사과했다. 재이는 사과를 받은 뒤 고맙다며 미소 지었다. 후식으로 메밀국수와 센차를 마셨다. 밤이 무르익자 환한 연등 빛을 쐬려는 인파가 너울 파도처럼 청계천으로 밀려왔다. 아마 동대문에서 시작된 행렬과 맞닿는 지점이 광교 부근이었다. 두 인파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부닥쳐 밀도가 다른 발트해와 북해처럼 선명히 상충됐다.


  “우리가 만난 지 구십사일 된 거 알아?” 찻잔을 비운 재이가 말했다. “구십사일?” “응.” “응.” 나는 식은 센차에 혀끝을 살짝 적셨다. 찻잎이 가라앉아 옅은 수색으로 떫은맛만 돌기를 타고 돌았다. “일요일이 백일이야.” “기막히다.” “사진 찍어줄게.” “그래.” 나는 일식집 벽면을 배경으로 턱을 괸 채 하나는 붕어 표정, 다른 하나는 복어 표정, 또 다른 하나는 뽀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중 마지막 사진이 가장 자연스러워 프로필로 썼다. 바깥은 여전히 퍼레이드가 한창이었다. 밤 열 시가 되자 연등 행렬이 이어졌고 캄캄한 인파 속에서 은빛 플래시가 초신성처럼 곳곳에서 터져 백색왜성이 되었다. 일식집을 나온 우리는 가로수 옆에 붙어 길 잃은 아이처럼 서성이다 주판의 알이 되어 꿰어진 행렬의 뒤편을 따라갔다. 행렬은 종묘광장공원까지 이어지다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는 세운초록띠공원으로 빠져나갔다. 돌로 만든 벤치에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남자는 자신의 차로 언니를 데려다줬다. 오디오에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이 흘러나왔다. 시트가 가죽으로 된 고급 세단이었다. 헤어진 뒤 언니가 씻고 나오자 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남자가 보낸 메시지였다. 즐거웠다는 짤막한 인사.


  재이와 나는 양화대교를 관통하는 한강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 뱃머리에 서서 성산대교의 금빛 야경을 바라다봤다. 이름 모를 재즈 음악이 확성기로 퍼져나가 금빛 물결이 스쳐 간 자리마다 춤사위가 번졌다. 할로겐램프가 유람선 기둥마다 설치되어 줄줄이 노란빛을 아래로 쏘았다. 강물은 검고 하늘은 붉고 유람선은 윔홀을 통과하듯 금빛으로 가로질렀다. 유람선 왼편으로 불꽃이 솟구쳤다. 폭죽을 올려다보자 이상하게 유람선에서 청혼받은 이경의 언니가 떠올랐다. 그날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오늘과 같았을까. 재이와 나는 밤하늘에서 피었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불꽃을 쳐다보다 입을 맞추었다. 재이의 따뜻한 숨이 내 입안에 들어왔고, 그러자 불안해졌다.


  언니와 남자는 지하에 위치한 바에서 베일리스 밀크와 진토닉을 주문했다. 네온사인을 두른 바는 어둡고 목요일이라 한적했다. 적색 벨벳의 보타이를 맨 바텐더는 지거로 알코올의 비율을 맞춘 초록빛 액체를 쉐이커에 담아 흔들었다. DJ 오카와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다리가 높고 등받이가 없는 둥근 스탠드바 의자에 앉아 버건디 빛을 내는 스트레이트 팁 구두를 공중에 띄워 까닥였다. 몹시 바쁜데 수정 씨를 보는 건 즐겁다고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경의 언니 이름은 수정이고, 유수정이란 건 내게 알린 적 없지만 나는 왠지 유수정일 거라 상상했다. 언니는 남자가 주문한 진토닉을 뺏어 찔끔 삼켜 보았다. 뜨거운 고드름이 식도에 걸린 것만 같았다. 언니와 남자는 마티니 잔에 담긴 칵테일을 반쯤 마신 뒤 바를 나왔다. 불 꺼진 상점들과 주차된 차들 그리고 취객 두 명이 알코올 섞인 침을 찍 뱉으며 스산하게 지나쳤고 순찰차를 탄 경찰이 언니와 남자를 차례로 훑어보곤 스쳐 갔다. 자정에 다다른 시각이었다. 언니는 핸드백에서 걸려오는 벨소리를 죽이고 폰을 밝혀 들여다봤다. 동생인 이경의 메시지였다. 언니는 핸드백 속으로 폰을 감춘 뒤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부스스한 구름 몇 점이 전선 위에 누워 있었다. 바래다 드릴까요? 남자가 말했다. 우리 둘 다 취했잖아요. 언니가 대답했다. 남자가 큰 도로의 연석 아래로 내려가 손을 흔들었다. 한 대의 택시가 감속하며 남자 옆으로 다가왔고 언니가 이내 돌려보냈다.


  맞은편에 파라다이스모텔이 있었고 둘은 물끄러미 네온사인 간판을 올려다보다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모텔 천장 아크릴 거울에 비친 둘의 나신 형상이 마르스와 비너스 같았고 생명력을 잃은 물감처럼 메말라 보였다.


  이경은 자주 말했다. 남자로 보이고 싶은 적도 보이기 싫은 적도 없다고. 여자라서 억울하다고 느낀 적도 울어본 적도 없다고. 우리는 그냥 사람이고, 언니도 그냥 사람이야, 하고 술을 마실 때면 이경은 성별을 뗀 채 그렇게 자주 사람으로서 주절거렸다. 이경의 머리칼은 조금 더 짧아져 이젠 귓바퀴에 걸렸다. 나는 이따금 말했다. 이니드 같아. 그러면 이경은 이니드는 이렇게 짧지 않아,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니드 같아. 우리는 『판타스틱 소녀 백서』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았고, 가끔 나는 늙은 남자와 섹스 하는 꿈을 꿨고, 그러면 전연 늙지 않은 정연 선배가 내 앞에 나타나 아기 울음소리를 내며 내 아랫배 속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쓴 이경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몸을 낮춰 챙 아래 감춰진 이경의 얼굴을 반히 올려다봤다. 붉은 반점이 왼 광대뼈를 타고 넓게 퍼져 아프게 부어올라 있었다. 얼핏 봐선 필러 시술의 부작용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꾸 얼굴을 때려.”


  헤어지자 말한 날 남자의 주먹이 이경의 얼굴로 향했다. 이후로 이경은 어떤 누구도 사귀지 않았다. 학과에 있던 남자들을 미워한 건 아니지만 나하고만 붙어 다녔다.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재이를 내게 소개해준 이유. 재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니면 그냥 재이인지. 끝끝내 물어보지 못할 게 분명해서 이경에게 모든 남자가 다 난폭하진 않다는, 당연한 조언을 해줄 수가 없었다. 내겐 자격이 없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니? 가민이를 두고 섹스를 해? 내가 아니라 네가 맞아야지. 처맞아야지. 죽도록 얼굴을 처맞아야지. 살인자 년. 미친년. 시발년. 갈보년. 걸레 같은 년. 잘 모르지만 나는 나에게 욕을 아주 잘했다.


  폭죽은 막바지에 다다라 보였다. 입을 맞춘 뒤 재이와 나는 얼마간 폭죽들을 올려다봤다. 재이의 파란 눈동자 안으로 빨간 불꽃이 들어와 자줏빛을 띠었다. 이내 노란 불꽃이 들어와 초록빛을 띠었고, 이 세 가지의 색이 섞이자 빛의 삼원색이 되어 하얗게 변했다. 밤하늘 위로 불꽃이 사그라졌고 어둠 속에 유람선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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