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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순 Oct 26. 2024

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19)

새해

  재이는 괌에서 한 시간 일찍 새해를 맞았다. 새해를 한 시간 남겨둔 나와 유미는 종각역에 있었다. 청계천 돌다리 위에 한 남성이 입김을 내뿜으며 ‘인류는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가 붉은 궁서체로 쓰인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서 있었다. 나라가 어수선했지만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군데군데 LED 풍선을 든 아이들도 보였다. 새해를 앞두고 울분과 환희가 공존했다. 보신각 일대는 이미 자리 잡은 방송국 차량으로 가득했고 경찰 인력과 서울시 인력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거리와 인파를 통제했다. 시민들은 자정을 앞두고 따뜻한 카페나 레스토랑을 찾았다. 마치 새해만을 위해 올해 남은 시간을 모조리 죽이기로 작정한 듯이.


  “언니.”


  유미가 금광을 캔 듯 빈자리가 난 카페로 뛰어가며 내게 오라고 손짓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간 유미가 빈 테이블에다 자기 토트백을 훅 던져 안착시켰다. 그 시각 기애 씨는 막 제대한 아들과 정동진에 있었다, 아마. 아침에 떠오르는 첫해를 보기 위해 정동진을 갈 거라며 내게 귀띔했었다. 몇 시간 열차를 타고 가야 할 테고, 이미 도착해 역사 안에 쭈그려 앉아 입김을 내뿜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미는 트레이에 담긴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두곤 잠시간 추운 바깥으로 나가 통화에 열중했다. 입을 가린 채 미소 짓는 유미가 서리 낀 창밖으로 희뿌옇게 보였다. 희끄무레한 불빛과 희끄무레한 인파가 유리창에 달라붙어 응결돼 김이 서렸다. 얼은 유리창을 체온으로 녹여 보았다. 손끝 위로 유미가 움직였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손끝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그 안에 유미를 넣어 가뒀다가 손바닥을 활짝 펼쳐 서리를 지웠다. 희뿌옇던 유미가 금세 선명해졌다.


  새해 인사가 통신을 타고 퍼져나갔다. 한 시간 빨리 새해를 맞은 재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의례 하는 새해 인사말이니 나도 한 시간 뒤에 보내줘야 한다. 모두는 끝보다 시작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할 때 끝이라는 건 언제나 후회를 낳기 마련이고, 그 후회를 상쇄시켜 줄 유일한 방책이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시작은 언제나 끝을 염두에 두기에 이러한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 시작이 끝이 되고, 끝이 시작이 되는, 그러니까 영속 관계. 시작은 반드시 시작을 시작에 둬야 하기에 오롯이 시작으로써의 ‘시작’만 될 수 있다는 것. 끝이 없는 시작은 시작으로만 존재할 뿐 아무런 에너지가 없다. 이상한 공상이었고, 끝에 서서 시작을 기다리는 나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유미와 나는 타종 행사를 삼십 분 앞두고 카페를 나와 보신각 쪽으로 걸음 방향을 틀었다. 이미 추위에 내몰린 인파가 보신각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종소리에 맞춰 소망을 하나씩 마음속으로 빌겠지. 그만큼 후회로 가득했던 잡념도 밀어내겠지. 모두 공평하게. 그리고 그중 나처럼 양양을 지운 여자도 있을 거라고.


  오,

  사,

  삼,

  이,

  일.


  모든 시민이 일제히 우렁차게 외쳤다. 서른세 번의 종소리가 공기를 균열 내며 울렸다. 모든 게 지워지고 새롭게, 새롭게 시작되는 날. 그런데 어쩐 일인지 새해가 밝았는데도 정연 선배와 양양은 내 기억 속에 지워지질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고 나니 보신각에는 방송국 차량도 인파도 자취를 감췄다. 갈색의 플라이트 재킷을 껴입은 유미가 두 손을 주머니에 쏙 감춘 채 언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팩소주에 빨대를 꽂아 유미에게 슬쩍 건넸다. 한 모금 삼킨 유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니, 새해 소원 빌었어요?”

  “눈 깜짝하는 사이에 까먹었어.”


  오, 사, 삼, 이, 일, 을 함께 외치는데 아무런 소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소원은 뭘까. 오, 사, 삼, 이, 일일까. 나처럼 절반은 오, 사, 삼, 이, 일이지 않을까. 유미에게 소원을 빌었는지 물었고 입김과 함께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재계약을 할 수 있길 바란다고. 나도 그럼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도 빈티지나 팔아볼까요, 하고 유미가 우스갯소리로 물었는데 농담으로라도 권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어딜 갈까. 가평? 춘천? 강릉? 유미는 가능한 서울과 멀리 떨어진 장소일수록 좋을 거라 했고, 그러면 여수? 순천? 통영? 목포? 하고 떠오르는 대로 아무 지명이나 뱉어내다가 우리는 헤어졌다.


  “여수로 가요.”


  다음날 재희가 끼어들었다. 유미와 나는 재희의 카페 바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이 퉁퉁 부은 유미가 재희의 말에 호응했다.


  “여수요?”


  너무 멀지 않나 싶었는데 재희가 후회하지 않을 거라며 자신했다. 가 본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너무 당당하게 없다고 대답해 당황스러웠다. 이 이야길 제이에게 했더니 자기도 여수에 가 본 적이 없다며 여행에 끼워달라고 했다. 우리는 다음 주 목요일 재이가 방콕에서 돌아오는 날에 맞춰 함께 여수로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한 사람 더 합류했는데 기애 씨였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 일주일 동안 블랙스타나 기애 씨가 운영하는 중식당에 비밀리에 모여 결사단처럼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꼬박 하루 자고 돌아오는 짧은 여정인데 여느 때보다 우리는 단결력이 좋았다. 각자 먹고 싶은 음식과 가 보고 싶은 장소들을 추려보았다. 재희는 해상케이블카을, 유미는 아쿠아플라넷을 말했는데, 두 곳 모두 들르기엔 빠듯해 기애 씨에게 물었다가 엉뚱하게 오동도로 결정됐다. 여수에 가 본 건 기애 씨가 유일했다. 오래전이라 이젠 다르겠지만 그때의 오동도는 지상낙원이었다는 회상에 우리 모두 설득당했다.


  당일 아침 유미와 재희가 먼저 서울역에 도착해 있었다. 부쩍 가까워진 둘을 훔쳐보다가 기척을 내며 다가가자 시치미를 뗐고 내가 수상하다며 눈을 오므렸다. 새벽 비행을 마치고 온 재이는 열차 안에서 잤고 우리는 방해하지 않았다. 재희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고 내가 한 번씩 툭툭 치며 참견하자 데이빗 보위의 베스트 앨범이라며 레코드 리스트를 보여줬다. 「Blue Jean」으로 시작된 노래는―유미와 나는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말하자면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에 맞춰. 용산역을 지나칠 땐 첫사랑이 살던 곳이라고 유미가 말했고, 광명역을 지나칠 땐 재이가 군 복무를 한 곳이라고 나는 말했다. 오송역, 공주역, 익산역을 지나 전주역을 지나칠 땐 우리 둘이 꼭 전주한옥마을에 가 보자며 앞다퉈 약속했다.―「Starman」으로 끝이 났다. 우리 둘의 우정이 우스운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재희가 피식거렸다. 여수에 도착할 때까지 재이는 잠만 잤다. 기애 씨는 앞 좌석에 혼자 떨어져 앉아 챙겨 온 책을 읽었는데 훔쳐보니 양귀자의 『모순』이었고 이미 두 번이나 읽었다며 내게 권했다. 읽은 책을 뭐 하려고 또 읽느냐며 물었더니 기애 씨는 우리 인생이 매일 같이 반복되니 반복해서 읽는 거라는 문학적인 현답을 내놓았다. 뒷자리에 앉은 나는 한 번씩 기애 씨에게 기척 해 간식을 건네줬다. 그러다 보니 여수에 도착했고 재희가 역사 앞에 주차된 렌터카를 찾아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엔 유미가 뒷좌석엔 나와 재이, 기애 씨가 서로 밀착된 채로 앉아 갔다. 화창했고 서울보다 따스했다.


  우리는 홍합이 폭탄처럼 쌓인 해물 라면을 먹은 뒤 해상케이블카를 탔다. 맞은편에서 다른 케이블카가 가깝게 다가올 때마다 유미가 아크릴 창에 손바닥을 대고 흔들었다. 케이블카 바닥은 투명하게 나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여수 바다가 너울을 그리며 넘실거렸다. 나는 저 멀리 뻗어있는, 세상을 둘로 나눈 수평선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지구가 둥글다는 게 믿기지 않아 기애 씨에게 지구가 정말 둥근지 물었더니 당근을 더 먹으라는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벌써 여행이 끝자락에 다다른 듯한 아쉬움이 밀려와 유미, 재희, 재이, 기애 씨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봤더니 자기들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른 게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나는 케이블카에서 제일 먼저 내려 오동도로 가는 방파제 길목에 섰다. 양쪽에서 몰아친 해풍이 서로 맞부딪쳤다. 오동도까지 수직으로 뻗은 방파제를 따라 걸었다. 바닷바람이 방파제를 넘어와 우리들의 허리춤까지 차올랐고, 동백꽃들의 봉우리가 진자운동을 했다. 평일이라 한산했고 우리는 음악분수 앞에 놓인 나무 벤치에 쪼르르 앉아 잠시간 평안하게 쉬었다.


  장을 보기 전에 먼저 숙소부터 들렀다. 숙소는 바다가 앞을 비추고 얕은 구릉과 노을이 빚어낸 적록색 숲이 뒤를 채우는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독채였다. 기애 씨와 재이가 숙소에서 불을 지필 동안 유미와 나, 그리고 운전 담당인 재희 셋이서 하나로마트로 향했다. 기애 씨가 은연중에 체리를 먹고 싶다고 말한 게 떠올라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제일 먼저 과일 코너로 향했다. 잘 먹지 않던 과일들, 체리, 망고, 아보카도, 샤인머스캣, 멜론 등을 마구잡이로 카트 안에 담았다가 망고와 멜론은 다시 뺏고 그 옆에 냉장 진열된 용과를 집어 들었다가 재이의 부모님을 봰 지난날이 떠올랐다. 내가 선물로 건넨 과일바구니 속 과일들이 꼭 저런 평소 먹지 않던 품종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취업 못 한 나를 바라보던 재이 부모님의 눈길에 나는 그대로 미끄러졌다. 과일바구니 탓이 아니지만 고기로 사갈 걸, 하고 후회했었다. 그래서 육류 코너에서 삼겹살 이 킬로그램과 소고기 등심과 채끝도 조금 샀다. 장 본 비닐봉지를 트렁크에 넣자 가득 찼고 시동을 건 재희가 차가 무거워졌으니 기름값을 더 내놓으라고 채근했다. 숙소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데이빗 보위의 「Space Oddity」가 여러 커버링 버전으로 흘러나왔다. 어느새 사위가 깜깜해졌고 우주에서 미아가 된 톰 소령처럼 우리도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고, 아니 실제로 길을 잃어버려서 한참 헤맨 다음에야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비포장의 시골길로 찾아 들어갔다.


  우리가 얼추 도착할 시간에 맞춰 재이는 바비큐 화로에 숯을 넣고 불을 지폈다. 저 멀리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뿌연 연기가 하얗게 보였다. 조수석에 앉은 유미가 저기다, 하고 외쳤고 때마침 내비게이션 안내음도 도착지점까지 삼백 미터가 남았다며 알려주었다. 야외 캠핑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기애 씨는 멀리서 다가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두 눈을 피해 찡그렸다. 재이와 재희가 트렁크에 있던 짐을 꺼내 옮겼고 유미와 나는 과일과 채소를 싱크대로 가져가 씻겼다. 기애 씨는 모기향을 피우고 물을 끓여 각자 고생하는 우리에게 커피를 나눠 줬다. 달궈진 그릴에 삼겹살 한 덩어리를 올렸고 마음이 급한 나머지 우리는 채 익기 전에 술잔부터 높이 들어 부딪쳤다. 술안주로는 아보카도가 최고라고 유미가 추켜세웠는데 우리 모두 고기만 집어 먹었다. 고기가 줄어드는 양에 비해 과일은 남아돌아 그릴에 모두 때려 부어 고기처럼 구워 먹었다. 여행 전엔 하고 싶던 이야기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막상 정점에 다다르자 모조리 자취를 감춰 나는 블루투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기애 씨, 좋아하는 노래 있어요?”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어둠 안으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손뼉을 쳤고 기애 씨가 박수에 맞춰 조근조근 따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유미가 기다렸다는 듯 조바심을 내며 재희와 산책하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스레 유미에게 어두우니 조심하라고 당부하려다 머쓱해 말았다. 기애 씨는 유니온잭이 그려진 극세사 담요를 무릎에다 포개어 덮고 화로에 두 손을 쬐며 비행 일이 궁금한지 재이에게 물어봤다. 봉급이나 일의 강도가 아니라 추상적인 물음들이었다. 밤하늘 위에서 바라본 땅은 어떤지, 비행기에선 비행기의 그림자가 언제까지 보이는지, 땅과 멀리 떨어진 순간이 무섭진 않은지, 구름과 구름 사이로 천둥 번개가 번쩍 치는지, 비의 씨앗은 뚜렷이 보이는지, 지상에서보다 태양이 더 커 보이는지, 남중국해를 지날 땐 별빛이 선명한지. 재이는 모두 성실하게 대답해준 뒤 비행은 참 지루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나 같이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을 텐데, 재이는 그 거대한 쇳덩어리 안에서 잠도 자고 책도 읽고 언젠가 지상직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며 자격증까지 준비했다. 잠시간 골몰하던 재이는 해외를 나가본 적 있는지 기애 씨에게 물었고 하와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 언제요?”


  기애 씨는 사별한 남편과의 유일한 여행이었다고 회상했다. 몸 둘 바 몰라하는 재이를 다독이며 기애 씨가 손을 내밀었다. 작고 거친 손이었다. 아주 자그마해 얼핏 어른의 손으로 보이지 않았다. 엉겁결에 손을 맞잡은 재이는 꽤 긴 시간 동안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있었다. 마치 영화 이티의 명장면이 연상돼 곧 노랗고 둥근달로 그림자를 그리며 떠오를 것만 같았다. 화로 속 숯들은 하얗게 타들어 가 틱틱, 연소하는 소리를 냈다. 기애 씨가 먼저 손끝을 풀어 재이에게 따뜻한 손을 가졌다고 말해주었다.


  기애 씨의 남편은 뇌출혈로 죽었다. 전날까지도 장을 볼 만큼 멀쩡했다. 병원에 있다는 연락은 사우나 세신사에게 전해 들었다. 남편이 목욕탕 바닥에 미끄러져 뇌진탕이나 타박상 같은 걸 입었을 거라 기애 씨는 걱정하며 응급실을 찾았는데 이동식 침대에 누워 있던 남편의 외관이 너무나 깨끗해 순간 안도했다고. 그런데 무언가 불안한 기운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에 핏기가 없고 동공은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손가락, 발가락이 모두 뼈마디를 잃은 것처럼 축 처져 있었다고. 커튼을 걷고 들어온 의사는 씨티 촬영 결과 뇌출혈이며 혈관이 많이 부풀어 올라 뇌가 제자리를 이탈했다며 차분히 설명했다. 아무런 동요가 느껴지지 않던 의사의 어투 탓에 기애 씨는 응급한 상태와 달리 이 순간 남편이 잠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주방으로 돌아가 허리 앞치마를 두른 채 기름칠한 웍에 갖은 야채를 넣어 볶을 것만 같았다. 의사는 계속해서 진단만 내렸다. 깨어나더라도 신경 손상은 피할 수 없고 정상적인 생활 또한 어려울 거라 짐작한 것과 달리 남편은 두어 시간 만에 죽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눈물이 흐를 새가 없었다고. 눈물이 난 건 장례를 끝마치고 식당 운영을 재개했을 때였다. 오랜만에 재개한 가게로 손님들이 북적였는데 아무도 남편을 찾지 않아 빈 식당처럼 공허했다고. 남편은 주방에만 머물렀다. 홀에 모습을 비추지 않아 가까운 단골 말고는 누구도 몰랐다. 제일 중요한 일을 담당했는데 제일 존재감 없이 사라진 사실이 가엽다고 기애 씨가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주춤대던 사이에 재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죽었어요.”


  뒷말인지 앞말인지 모르지만 죽었어요, 만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고개를 틀어 재이를 바라보니 파란 눈에 물이 고여 있었다. 눈, 을 붙여 눈물이라고 해석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 순간이 무척 영화 같다고 여겨졌다. 어느 평론가가 신파라고 비판했던, 그런데 또 어느 관람객이 우리 아버지의 일이라며 두둔했던 사건. 사람은 결국에 죽는데 죽은 사람을 기록하는 건 너무나 이질적이고 개연성이 없다.


  “제 친구도.”


  골육종. 섬유근육통을 앓았던 친구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골육종 진단을 받았고, 엉덩뼈에서 시작된 암세포는 갈비뼈를 지나 어깨뼈를 타고 슬금슬금 올라와 병실 침대 위에서 온몸을 꼬며 고통을 직시했고, 죽기 직전에는 좌측 폐로 암세포가 전이돼 거친 숨소리 탓에 어떤 대화도 온전히 나눌 수 없었다고. 왼쪽 골반은 드러내 허리가 잘린 듯 살가죽이 움푹 파여 제대로 맞는 환자복 바지도 없었다. 척추가 왼편으로 뒤틀려 걷거나 서거나 앉을 수도 없는 상태였고 몸속 장기들은 모두 밖으로 뚫고 나가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살가죽 위로 자태를 선명히 드러냈다. 사람이 죽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상상보다 길어서 재이는 친구의 고통스러운 나날을 이 년 동안 목격했다. 한 번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면, 빨리 끝나는 게 낫지 않냐는 몰인정한 잡념이 병원을 나서는 자신을 괴롭혔다. 복부에 무언가 잡히는 건 정말 이상한 느낌이야. 아직 살아있니, 하고 친구는 빛을 잃은 눈으로 재이를 응시했다. 나는 상상했다. 재이와 내가 죽는 순간. 죽은 순간은 궁금하지 않다. 죽은 순간은 오롯이 죽었을 테니까. 죽은 사람보다 죽기 직전의 사람을 지켜보는 게 고통스러운 일이잖아요, 하고 불씨가 죽어가는 화로에 대고 재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에버랜드에 가기로 했었는데, 못 갔어요.”


  그래서 여전히 친구가 머무는 대화방을 못 나간다고. 여길 나가면 정말로 죽은 게 된다고. 캠핑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난 기애 씨가 양팔을 벌려 재이를 안아주었다. 그 틈에 유미와 재희가 기척을 내며 돌아왔다. 유미는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가 눈물을 훔치는 재이를 보곤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사람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일까지 슬프다는 게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밥을 먹다가도 내가 살아 죽은 것을 생각하고, 그럴 때면 낙태, 라고 쏘아붙인 선배의 말투와 표정이 문득 나타났다. 그날 후로 선배는 내 매장에 관한 후기를 삭제했고 나는 광고 업체에 따로 보고하진 않았다. 다만 여전히 교수가 살아있는지 궁금했다. 여전히 살아있겠지. 죽는 일은 흔한데 내 안에서 죽은 건 나밖에 없었다. 한날 가게를 찾아온 손님이 그랬다.


  “이 많은 옷 중에 죽은 사람의 것도 있겠죠? 사람이 죽으면 옷은 짐이 되고 그게 빈티지 시장으로 유입된단 소릴 들었어요.”


  여자는 눈이 큰 데다 깊고 턱 밑에 희미한 점이 있었다. 짙게 팬 팔자주름과 상반되게 인중이 좁아서인지 어려 보였다. 턱선에 닿은 은색 귀걸이와 집게 핀으로 고정된 머리칼 아래로 솜털이 목덜미를 타고 보송하게 이어져 있었다.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은 피부와 아주 밝은 입술로 탁하게 말했다. 죽은 사람의 옷을 갖고 싶다고. 옷은 사람이 입고 사람은 죽는다. 사람은 죽지만 옷은 죽지 않으니까. 이 둘은 죽는 순간까지 함께하지만 결국 죽는 건 사람뿐이다. 손님은 가장 해지고 더럽고 오래돼 보이던 옷 한 벌 집어와 내게 내밀며 죽은 사람의 옷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손님 등 뒤에 대고 나는 나지막이 싸이코라 중얼댔는데, 이제는 왠지 그 반대가 되었다.


  그이가 떠나고 그의 냄새가 밴 건 옷가지밖에 없었다고. 유미와 재희는 나와 재이를 번갈아 보다가 기애 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 벌도 버리지 않고 모두 껴안고 살아갔는데 얼마 전에 위탁 업체를 통해 모두 정리했다고. 이 골목에 헌옷을 파는 옷가게가 들어온 건 잘된 일이라고. 쥐고 있을 땐 기억이었는데 나누고 보니 추억이 되었다며 고마워했다. 헌옷. 헌옷수거함에 버려진 옷들이 어쩌면 모두 버려진 옷이 아닐지도 모르지. 모두 버려진 게 아니라 잊기 위한 일일 수도 있겠지. 어릴 적 나는 갖고 싶은 옷들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아주 어릴 때는 가난해서 갖지 못했고, 어릴 때는 가난한 데다 뚱뚱해서 갖지 못했고, 다 커서는 기억할 게 없어 살 것도 없었다. 화로 속 불씨는 꺼져갔다. 검게 그을린 그릴 위로 식은 고기와 무른 과일이 어느 전쟁 속 참상처럼 뒤엉켜 있었다. 용기를 내고 싶었다. 자리에 일어선 나는 손을 내밀었다. “우리 산책하자.” 재이가 내 손을 잡았다. 뽀뽀하고 오라며 유미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안간힘을 썼고 당연하지, 하며 나는 맞받아쳤다.


  비가 내린 적도 없는데 풀밭이 축축했다. 재이가 축축한 이유는 이슬 때문이라고 알려주었다. 이슬, 하고 나는 발음했고 재이가 느슨하게 맞잡고 있던 손을 쭉 펴 깍지로 꼈다.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하고 재이가 사과했다. 누구나 비밀이 있기 마련인데 재이가 숨긴 비밀은 너무나 숭고해 내가 초라해졌다. 재이야, 내가 아주 잘못했어, 하고 무릎을 꿇으면 어떨까. 사위가 어두웠다. 수소로 가득한 우주 공간에 발을 내딛듯 자꾸만 축축하게 뒤로 밀려났다. 걸음을 멈추면 내가 저 뒤로 밀려나 다신 재이 곁으로 다가가지 못할까 봐 겁이 났고 그러자 누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멀리서 울음이 터졌다. 그 울음은 어느새 내 앞으로 왔고 눈물이 됐다. 재이는 별일 아닌데 운다며 토닥였다. 나는 별일 아닌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별일 아닌 게 뭔데, 재이가 되물었다. 별일 아닌 게 아닌데, 별일 아닌 거라 별일인 것 같고, 하지만 정말 별일인 게 분명하다고 주절거렸다.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그 별일이 뭔가요, 하고 재이가 사뭇 물어왔다. 꾸물대자 깍지 낀 내 손을 더욱 꽉 움켜잡았다.


  “미안, 미안해.”


  내가 분노할 일은 나를 제외한 모든 일이라 내게 분노할 수 없고 오로지 나는 나를 두고 슬퍼할 권리밖에 없다. 이 감정이 너무나 나약하다. 낙태권을 두고 찬반을 벌이지만 자궁 속엔 투표권이 없다. 이런 감정. 그건 양양이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 양양은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양양은 양양일 뿐이니까. 목이 메었다. 목 언저리에 양양이 걸린 것 마냥. 양양이 말이야, 사실, 내 안에 있었다고 어둠 언저리에 던져 놓자 어둠 뒤로 울음소리가 밀려와 울음 짓게 했다. 캄캄하고, 재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보고 싶지 않았다. 배신, 은 선배를 만나는 동안 떠올려본 적 없다. 나는 배신당한 기억이 없다. 그게 명료해진 건 재이를 만난 뒤였다. 감정이란 건 실수는 알아차려도 거짓은 간파하지 못해, 그 시절의 나는 배신이란 감정을 올곧게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도 그렇다고 미성숙하지 않은, 나란 한 사람에 담긴 속물성만 들여다볼 만큼 시야가 좁아서 어느 때보다 타인에게 조종당하기 쉬웠다며 변명하고만 싶었다.


  “이젠 괜찮아?”


  늘 그래왔듯이 나를 먼저 챙겼다, 재이는.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고 꼭 쥐고 있던 재이의 손이 느슨하게 풀리자 슬펐다가 이내 끌어 안아줘 재이의 가슴에 대고 고마운지 미안한지 모를 눈물만 흘렸다. 용서일까. 그게 아니라도 재이와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재이는 다시 한번 내게 괜찮은지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하자 멀리서 양양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고 내 안을 채우던 이물감이 순간에 사라졌다. 멈추지 않고 나는 모두 자백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고개를 드니 북극성이 보였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숲을 나올 때까지 재이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상기된 내 얼굴을 보자마자 유미가 둘이서 뭐 했냐며 유난을 떨었다. 태연한 얼굴로 재이가 뒷정리를 할 동안 나는 풀숲에 숨어 울기만 했다.


  다음 날 우리는 열차 시간이 남아 아쿠아플라넷으로 갔다. 액체 속에서 흐늘거리는 가오리 앞에 선 유미가 두 팔을 활짝 펼쳐 가오리연이 되어 떠 다녔다. 재이가 나를 피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대화를 섞지 않았다. 내가 말을 걸지 않았고 범죄자처럼 재이만 피해 다녔다. 고작 네 명이 움직이는데 나는 잘도 피해 다녔다. 재이가 기애 씨를 넘어 나와 거리가 좁혀지려고 하면 나는 빙그르르 뒤로 돌아 키 큰 재희 등 뒤에 숨었다. 눈치 빠른 재희가 둘이 술래잡기하느냐며 물었고 나는 나지막이 내가 술래는 아니라고 귓속말을 했다. 술래인 재이에게 잡히면 우리 관계가 끝장날 거 같아 가능한 도망 다니고만 싶었다. 그 순간 누가 내 뒷덜미를 움켜잡았고 긴팔 티셔츠에 달린 후드가 당겨 내 머리에 씌어졌다.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키 큰 재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잡혔으니 그만 안심하라며 나를 앞질러 갔다. 재희의 주문처럼 정말 안심되었고 그제야 재이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걸었다. 재이는 날 잡지도 당기지도 뿌리치지도 때리지도 않았다, 열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돌아가는 내내.


  서울역에서 다들 지친 기색으로 작별을 나눈 뒤 헤어졌고 재이와는 헤어지지 않았다. 헤어지기 싫다고 재이에게 매달렸더니 오늘 밤에 국제선 듀티가 있다는 현실적인 대답만이 돌아왔다.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이런 연유로 울고 싶진 않아 비행 잘 다녀오라며 인사했다. 재이는 다시 한번 나를 꼭 안아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조금씩 나와 멀어져 가 흐릿해졌다. 재이가 떠난 후로도 나는 서울역에 혼자 남아있었다.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혹여나 재이가 되돌아와 내게 확신을 주지 않을까 하는 유아적인 기대감도 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이제 보딩한다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눈물이 왈칵 났고 잘 다녀오라는 답장을 보낸 뒤에야 나는 서울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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