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재이를 보았다, 아마. 하루 동안 세 번이나 보았다. 이른 아침엔 삼각김밥을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가 구석에 앉아 컵라면의 면발을 삼키던 재이를. 한낮엔 블랙스타를 지나치다가 창 안에 숨어 나의 눈을 피해 눈웃음 짓던 재이를. 늦은 저녁엔 지하철 안에서 플리스 점퍼를 입고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그만저만한 표정으로 서 있던 재이를. 나는 참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은 참 우연 같아요.”
유미가 복권 한 장을 내밀며 지난주 당첨자 상금이 삼십억 원이었다며 자기도 삼십억 원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한 번에 삼십억 원을 갖기보다 삼십억 원을 벌 수 있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삼십억 원을 차곡차곡 버는 부자보다 삼십억 원쯤은, 하고 쓸 수 있는 졸부가 되는 편이 낫겠지. 그 말을 하고 나자 북극성이 보고 싶어졌고 하늘엔 여전히 태양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태양은 여전하고 폭발할 기미도 없고 지구가 망할 일은 더욱 없어 보였다.
여행할 동안 빈티지 짝이 하나 도착했고 뜯어보니 꽃무늬 앞치마와 커다란 차렵이불 세 채가 압축돼 있었다. 곧바로 거래처에 항의 전화를 하니 계약 조항을 살펴보라며, ‘옷’만 배송된다는 조건은 없지 않으냐고, 이제까지 팔찌도, 벨트도, 선글라스도, 반지도, 배지도 다 잘 받아오지 않았냐고 되레 타박했다. 그렇다고 이불을 팔 수는 없지 않으냐고 따졌더니, 두꺼운지 되물었고, 두껍다고 대답하니 그러면 겨울이라 팔 수 있지 않으냐며 또다시 타박했다. 괜히 다른 거래처를 튼 게 후회되었다.
두 손으로 차렵이불 세 채를 끌어안고 코인세탁소로 뒤뚱 걸어가는데 불쑥 누가 내 짐을 뺏어 갔다. 올려다보니 키가 큰 재희였다. 이불이 뭐냐고 물어 앞으로 팔아야 할 상품이라고 체념했고 이런 것까지 파냐는 웃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모든 게 우연인데 그 속에 이상하게 재이만 없었다. 재이가 잘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인데 막상 연락할 자신이 없었다. 오래전 하노이가 어떤 곳이냐고 물었을 때 재이는 쌀국수가 맛있고 한국인이 많고 낮과 밤의 온도가 같은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에 나는 서울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턱을 괸 재이는 장소가 만들어낸 냄새가 다르다고, 가 보지 못한 너는 모를 거라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 냄새만큼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재이보다도 생생히. 빈티지도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에 따라 냄새가 다르게 난다. 일본에서 온 건 축구화에 진흙을 채워 넣어 드라이기로 말린 냄새, 동남아시아에서 온 건 비 맞은 운동복에 사과식초를 두 방울 떨어트린 냄새, 미국과 유럽에서 온 건 네덜란드 치즈 위로 버드와이저 맥주를 쏟은 냄새가 났다. 가끔 이름 모를 제3국에서 날아온 빈티지에는 손톱 조각들을 샤넬 no.5 향수에 마구 빠트린 듯한 탈취제 냄새가 풍겼다. 이 모든 냄새는 세제와 섬유유연제, 인센스로도 충분히 빠지지 않아 매장 안에 한 데 섞여 부유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나라에서 날아온 냄새인지 잊어버렸다. 혹시 재이도 잊어버릴까, 나는 서둘러 여수에서 함께 찍은 우리의 다정한 사진들을 쓱 훑어봤다.
네 시간. 세탁과 건조를 끝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코인세탁소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데 강은에게서 연락이 왔다.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수화기 너머로 장사를 접는다는 대답을 했다. “접는다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나는 이불과 앞치마가 돌아가는 드럼세탁기의 원통을 잠시간 쳐다보다가 박차 일어났다. 강은의 가게는 버스로 다섯 정거장이었다. 오랜만에 다 무너져가는 판잣집 속에 들어서자 고요한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온 듯 일순 편안해졌다. 나의 태초. 태초의 뜻은 모르지만 언제 써야 할지는 명확히 알고 있어 불현듯 태초, 란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어느새 가슴팍까지 머리칼이 자란 강은이 성인이 되어 마호가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를 둘러싼 옷더미는 금방이라도 덮칠 듯이 위태로운 동시에 모세의 기적처럼 환히 길을 내주었다. 그사이를 뚜벅뚜벅 걸어가 강은 앞에 멈춰 섰다.
“저 망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망해야 크게 성공하죠.”
기가 막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미국으로 가게 됐어요.”
도대체 얼마나 큰 돈을 벌어야 여길 버리고 미국에 정착할 수 있다는 건지 계산해 보았다. 10RP? 100RP? 1,000RP? 내 머리로는 도저히 계산되지 않아 왜 떠나려는지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자유, 하고 짤막한 대답만이 돌아와 10,000RP를 상상하게 되었다.
“루리 씨, 이제 잘하잖아요.”
“아직 모자란걸요, 강은 씨.”
“네.”
“강은 씨!”
“무슨 걱정이에요. 세월을 견뎌 여기까지 온 옷들인데.”
강은은 리지드 데님의 오버롤 팬츠와 햇볕에 익은 레드윙 워커부츠를 신고 있었다. 플라넬 소재의 타탄체크 셔츠는 하얗게 보풀이 일어 미국 콘벨트 농장 주인이 곡물창고에 걸어둔 채 작업 때만 찾아 입을 법해 보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강은이 걸치자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옷 말고 자신을 보라고 한 말 기억하죠?”
강은이 말하자 지난밤 풀숲에서의 재이가 떠올랐고 그러자 얼굴 전체가 경직돼 어서 직고하라며 나 자신에게 외쳤다.
“비밀을 발설했는데 잘한 걸까요?”
강은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그랬다면 애초에 비밀이 될 수 없던 겁니다.”
명확했다. 너무 명확해서 김이 샜다.
“참 똑똑해요.”
강은이 자리에 앉은 채로 기다란 스테인레스 폴대를 손에 쥐고 상단 벽면에 걸린 옷 한 벌을 집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가르치는 건 쉬워요. 배우는 게 어렵지.”
반질반질한 말가죽 재킷이었다. 내 배꼽쯤 올 만큼 짧은 총장이었고 양 소매 끝자락엔 단단한 은색 지퍼가 대롱 매달려 있었다. 팔꿈치엔 굵은 주름이 서너 개가 휘장처럼 그어져 있었다. 등판 프린트에는 비키니 차림의 금발 백인 여인이 한쪽 다리를 하늘 위로 꼿꼿이 편 채 비스듬하게 누운 자세로 윙크를 하고 있었다. 핀업 걸.
“선물로 드리죠.”
강은이 건넨 가죽 재킷을 두 손으로 받았다. 서양적인 외모의 젊고 늘씬한 여인이 파란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비웃었다. 왠지 기분이 나빠 가죽 재킷을 반으로 접어버렸다.
“이거를요?”
“아니요. 여기 옷들 전부.” 강은이 자신을 둘러싼 옷더미를 바라다보았다. 원버튼, 투버튼, 쓰리버튼으로 된 블레이저와 밑위가 긴 청바지들과 신치백. 물이 빠진 야구모자, 갈변한 A2 재킷들, 시대정신이 담긴 스웨트셔츠, 은장과 금장, 정유소 점프슈트, 인앤아웃 티셔츠, 푸르게 바랜 워크재킷, 미야시타 타카히로와 헤미 카이. 핑크 플로이드, 로큰롤을 만든 밴드 티셔츠와 빛이 굴절되어 흘러가는 프리즘. 강은에게 이 옷들에 담긴 기억에 관해 들은 적이 없다. 옷은 직관적으로 바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라 언제나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를 드러내는 일은 오로지 이처럼 나의 생각뿐이고, 들킬 우려는 나 자신밖에 없어 매번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차라리 그 부끄러움이 교수에게 배운 문학적인 사유라면 좋았을 텐데, 언제나 내 안에 담긴, 뜻하지 않게 피어난 부끄러움은 나로서 태동해 타인을 추종하다가 식어버리는 바람에 늘 남는 것이라곤 창피와 모멸뿐이었다. 창피와 모멸을 무릅쓰고 나는 전했다.
“고맙습니다.”
강은의 대답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반값입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아, 네.”
그래, 미국까지 간다는데 비행기 삯이라도 마련해줘야지,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수긍하자 비행을 떠난 재이가 생각났다. 재이는 어디로 갔을까. 연길, 아니 너무 짧다. 방콕, 이미 다녀왔다. 호치민, 라오스, 사이판이 떠올랐다. 호치민으로 떠난 재이가 사이공 스카이덱 위에서 서울 방면을 향해 응시했을까. 아니면 라오스로 떠난 재이가 블루라군에 맨몸을 던졌을까. 또 아니면 사이판으로 떠난 재이가 자살 절벽에서, 아니 만세 절벽에서 만세를 외쳤을까. 하나 모를 일이지만 내가 머무는 시차에는 재이가 없어 우리는 조금도 겹칠 일이 없다. 강은 씨, 그거 알아요? 하고 나는 입을 뗐다.
“거위랑 기러기가 같은 종이래요. 날지 못하게 하면 거위가 된대요.”
언제였더라, 경주 여행 때 재이가 알려주었다. 첨성대 덮개 위로 무리 지은 철새가 그림자를 내리며 떠오를 때. 그리고 커다란 날개를 뻗어 온통 푸르른 창공의 빛깔들을 뚫고 자유로이 활강할 때, 잠시간 눈을 감아 어둠을 넣어 보았다. 첨성대는 별이 아니라 철새를 관찰하던 기구였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첨성대 위로만 철새가 떠다니며 정확히 덮개 안에다 똥을 쌌다. 15L/33R이라고 적힌 활주로 면과 가까워지면 재이는 폰의 렌즈로 고철덩어리의 그림자를 담았다. 초록 들판 위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앞으로 쏠려 침공하듯 가파르게 내려갔다. 랜딩 기어의 스프링이 요동치고 앞뒤로 앉은 승무원들이 침을 꼴깍 삼키고 피로와 기대가 섞인 승객들이 동그란 아크릴 창에 얼굴을 쏙 넣던. 한동안 재이의 배경화면은 활주로에 닿기 직전의 거대한 그림자였다. 간혹 재이가 거대한 그림자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간 신기해서, 그 안에 나를 넣어 보곤 했다. 우리 비행기는 곧 활주로에 닿습니다. 오늘 날씨는 아주 맑습니다, 하고 기장이 근엄한 말투로 방송했을까. 아마 화물칸엔 우리 매장에 도착한 짝도 있었겠지.
“강은 씨, 저는 빈티지가 싫어요. 너무 많은 기억이 있잖아요.”
강은은 대꾸가 없었다.
“그렇다고요.”
침묵을 지키던 강은은 이게 자신의 대답이라며 손을 내밀어 건넸다. 버마어로 써진 사탕이었다. 강은의 차림 탓에 하늘이 내린 성수 같았다. 하얗고 딴딴하게 포장된 사탕을 손에 꾹 쥔 나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정말 싱거웠고 매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탕을 입에 털어 넣었다가 얼마 못 가 뱉어냈다. 구겨진 사탕 봉지를 활짝 펴 보았다. 그리고 버마어로 써진 글자를 해석해보니 두리안이었다.
가게 문을 닫고 치과에 들렀다. 어금니가 썩었다고 진단하는 와중에도 의사는 몇 번이고 마스크 안에 숨겨진 자신의 코를 찡긋거렸다. 두리안, 이라고 외치고 싶은데 개구기를 끼고 있어 발음이 정확하게 새어 나오지 않았다. “드리어, 드리아, 드라인.” “좀 조용하세요!” 석션기를 손에 쥔 간호사가 신경질적으로 고함치며 경고했다. 간호사가 내 입속으로 석션기를 날카롭게 들이밀었고 이내 쓰라렸다. 썩은 치아보다 잇몸 부근에 불친절하게 닿는 금속성 석션기 탓에 아렸다. 진료가 끝나자마자 의사는 고개를 돌려 숨을 몰아쉬며 한 손으로 코를 막곤 사라졌고 간호사가 키스하듯 내 코앞까지 얼굴을 바짝 들이밀어 오늘 하루는 오른쪽으로만 드세요, 하고 당부했다. 화한 구강청결제 냄새가 코끝에 밀려왔다. 간호사의 작은 모공들이 세세히 보였다. 만성 비염인 간호사였다. 치과를 나와 길을 걷는데 이경에게서 연락이 왔다.
뭐해?
왠지 오랜만?
그냥 오랜만.
뭐해?
걷고 있어. 너는?
나도 걷고 있지.
우리 둘 다 걷고 있구나.
어디로 걸어?
너희 가게 쪽으로.
모퉁이를 돌자 매장 앞에 서 있는 이경이 보였다. 우리 매장에서 산 라이더재킷을 입고 있었다. 유이경, 하고 부르는 대신 작게 손짓했다. 이경은 크게 손짓하며 빨리 오라며 동동거렸다. 매장 안으로 들였더니 곧 택배가 도착할 텐데, 하고 토마토 젤리 모양의 미소를 지었다. 무슨 택배, 하고 물었더니 역시나 알려줄 기미 없이 입술만 잔뜩 오므렸다, 한니발 같이. 나는 궁금한 채로 이경과 한 시간 동안 매장에 머물렀다. 회사 생활이 어떤지 물어봤고 모든 회사원의 마음을 대변하듯 별로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나도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 재이를 만나기 직전에 그만두었지만. 입사를 꿈꾸던 회사에서 진행했던 삼 개월짜리 짧은 체험 인턴 프로그램이었다. 자평하자면 업무도 곧잘 했고, 술자리마다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거야, 하고 미래가 될 수 없을 포부를 남발했다. 삼 개월 뒤 예정대로 나는 미래가 없이 끝났다. 그사이 이경을 제외한 학과 동기들은 대부분 취업했고 누구는 성과급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이제는 스테이크 좀 썰어야지, 하고 우쭐댈 때 나는 3분 스테이크를 전자레인지로 돌려 편의점 구석에 앉아 썰었다. 반주로 가장 저렴한 국산 맥주를 곁들여 마시면서.
몇 해가 흘러도 나의 자기소개서는 변함없었다. 공란을 채울 만한 사건도 없어 차라리 은행을 털어 자기소개서에 은행까지 털 줄 아는 대범한 지원자라는 한 줄이라도 추가하고 싶었는데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은 그런 게 아닐 게 분명했다. 저놈이 언젠가는 우리 사옥까지 털어갈 거라 여길 테니까. 정신과에서는 우울증으로 진단했다. 회복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당분간 일을 쉬라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다닐 회사도 없다며 열을 내려다가 취업도 못 한 내가 한심해 회사원의 고뇌를 토로하곤 진료실을 나왔다.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도 내가 공상허언증에 걸린 무직자란 걸 의사는 자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경과 나는 취업에 실패했다. 선택이라 믿고 싶어도 둘 다 셀 수 없이 면접장을 들락거렸기에 그런 핑계가 내 뇌에 먹힐 리 없었다.
불쑥 그런 생각도 났다. 이경은 자기가 사랑한 남자한테 팔, 다리, 어깨, 목, 얼굴까지 맞았고 나는 허락도 없이 양양을 지워서 실패한 걸까. 둘 다 머리칼이 짧고 짧은 스커트를 입지 않고 여성적인 어투도 없고 가슴에 패드를 넣지 않아 볼륨도 부족하고 속옷을 위아래 세트로 맞춰 입지 않아서, 아니 이건 면접관이 볼 리가 없는데 선배와 밤을 지새울 일이 있다면 나는 습관적으로 한 벌로 맞춰 입고 나섰다. 왜일까. 선배는 속옷 하나도 세트로 맞추지 못하는 여자는 게으르고 둔한 거라 핀잔했다. 나는 게으르고 둔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 선배와 보낼 때면 전날 망에 브래지어도 함께 넣어 세탁했다. 어쨌든 둘 중 못 된 년은 나 혼자뿐이라 결국 이경만 취업한 거라고, 의사가 진단할 수 있는 건 매우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낡은 1톤 트럭이 덜덜거리며 가게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린 기사는 자기 허리춤까지 오는 직사각형 골판지 상자를 문 앞에 세워두곤 돌아갔다. 나는 택배 상자를 매장 안으로 옮겨 커터 칼로 뜯었다. 검은색의 원형 판이 블랙홀처럼 자태를 드러냈다. 이경과 함께 원형 판 아래에 네 개의 기둥을 각 끝에 붙이니까 원탁이 되었다. 허전해 보여서, 하고 이경이 수줍어했다. 우리는 햇빛이 잘 드는 쇼윈도 옆에 원탁을 두었다. 원탁 위로 셔츠, 바지를 접어 진열했다. 그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있잖아,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선배 기억나?”
“누구?”
“한정연.”
이경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아, 그 빈티지 좋아하던 선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배가 얼마 전 우리 매장에 찾아왔다고 했더니 이경이 바늘에 걸린 붕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뭐 사 갔어?”
“이젠 빈티지 좋아하지 않나 봐.”
“의외네.”
“재수 없지?”
선배가 빈티지란 것에 관심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나는 빈티지를 영원히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가다가 나이가 들어 죽었을까. 고개를 틀어 이경을 쳐다보니 머리칼이 유난히 더 짧아 보였다. 그 아래 뾰족한 스터드가 박힌 초커 목걸이도. 이경은 허공을 응시하다가 예전에 우리 둘 다 주식 다 말아먹은 거 기억하냐고 물었고, 그래서 내가 이 가게를 차리게 된 게 아니냐며 열을 냈다. 우리는 그 폭파된 주식 사기 컨설팅 방을 떠올리며 한참이나 증오했고, 더는 증오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을 즈음 쿨하게 헤어졌다. 이경이 떠나자 원탁이 유난히 커 보였다. 진동음에 화들짝 놀라 액정화면을 켰더니 재이에게서 온 연락은 아니었다. 올라오는 한숨을 간신히 밀어 삼키자 이런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재이와 눈을 맞추는 게 좋고 대화를 나누는 게 좋고 내 생각을 들어주는 게 좋고 더는 숨길 비밀이 없게 돼 좋은데, 재이가 나와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내 생각을 들어주고 내 비밀을 용납하게 돼도 이전같이 연애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궁금해 재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거기 날씨는 어때?
시차 탓인지 바로 답장이 오지 않았다. 대신 유미가 가게 문을 열며 언니, 이 탁자 뭐예요, 하고 물었다. 유미와 함께 뒤뜰 구석에 있던 낡은 의자들을 옮겨 와 원탁에 놓아 보았다. 이질적인데 묘하게 어울렸다. 우리 둘은 낡은 의자에 앉아 창을 뚫고 산란하는 빛을 맞았다. 나는 말을 놓으라고 했고, 유미가 머뭇대자 친구가 되었음을 공표합니다, 하고 내가 주먹을 원탁 위에다 세 번 두드렸다. 순간 빛이 위아래로 산란했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아 보았다. 하얗고 까만 점들이 각막 위로 떠다니다가 한데 뭉쳐 붉게 물든다. 이러다가 손님이 가게 문을 열어젖혀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물어본다면, 나는 빈티지를 제외한 모든 걸 파는, 팔기로 한 가게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온다. 「Where Are We Now?」. 기차 안에서 한쪽 이어폰을 뺀 재희가 내 귀에 꽂았다. 음울하고 검은 연기로 피어난 보위의 종말 같은 음성이 들려온다. 우리는 지금 어디인가요? 우리는 지금 어디인가요? 기차는 멈추고 풍경만이 움직인 기억. 눈을 감는다. 이제껏 살아오며 삼켜낸 감정, 죄책, 수치, 무력, 연민, 공포, 혐오, 절망, 그리고 적개심…… 이 모든 걸 날숨과 함께 뱉어내자 원탁 위로 둥글게 모였다. 빅뱅. 폰에서 재이란 이름이 뜨며 진동이 울렸다. 메시지를 열어보면 둥글게 모인 덩어리가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로 더욱 꾹 감아 보았다. 두꺼운 옷들을 포장한 뒤 봄옷들로 행어에 진열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길고 긴 비행을 마친 재이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를 찾아와 안아주는 모습. 재계약을 맺은 유미, 그래서 우리 둘은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되고, 이경에겐 근사한 애인이 생기고, 기애 씨는 여전하고, 2호점을 낸 재희, 그럴 리가. 눈을 뜨게 되면 이 모든 미래가 감쪽같이 사라지겠지. 눈을 감은 채로 더욱더 꾹 감아 본다. 흐릿한 실루엣, 아주 흐릿해서 모양이 드러나지 않은 실루엣. 흔들리는 불빛, 눈이 감기고, 눈이 감기고, 누가 나를 내려다보는 눈. 차가운 소리, 차가운 공기. 눈이 감겼다. 바이탈 음. 왜. 왜. 눈이 감기고, 눈이 감겼다. 나의 아주 깊은 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흐느낀다. 기억. 기억. 누가 내 어깨를 꾹 집어 눌러 스레 눈이 떠졌다. 일순 동공 안으로 빛이 투과됐다. 그러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감정이 이 원탁 위로 파― 하고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