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생각
지금까지 짧디 짧은 인생이었지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 가족의 문화는 어땠는지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배우고 느끼고 깨닫게 된 점을 적어보고자 한다. 홈스쿨링을 했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많았고, 생각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 얘기할 때 이름, 나이, 취미,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등등을 얘기하곤 한다. 나도 자주 그런다. 그러나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드러나는 것을 보아서는 나조차도 나 자신을 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된 건, 셜록 홈즈를 읽기 시작한 뒤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무슨 동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고, 어떤 연유로 그런 표정을 짓고 말을 하는지 셜록 홈즈는 그 뛰어난 두뇌로 추리하여 알아맞힌다. 어떤 행동을 하는 데 다 이유가 있다는 것. 12살 어린 소녀는 그 사실을 안 이후로부터 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난 “왜?”라는 질문을 잘 물어보았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왜 그 사건은 그렇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사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고 독서록을 쓰는 활동의 좋은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항상 책을 읽고 나서 독서록을 쓰려면 왜 주인공이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는지 물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 질문은 나에게도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태어났지?”
“나는 왜 그걸 좋아하고, 이걸 싫어하지?”
“난 왜 저 사람이 싫고 이해할 수 없을까?”
“난 왜 저 사람이 좋을까?”
“난 왜 저 책이 맘에 들지 않을까?”
“난 왜 그 이야기가 미치도록 좋을까?”
“나는 그때 왜 화가 났지?”
“나는 지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왜”라는 질문은 결국 근원을 향하는 질문이었다.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그렇게 질문하는 건 재밌기도 했다.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기도 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알아가는 데는 글쓰기도 한몫했다. 나만의 생각을 쓰더라도, 일기를 쓰더라도 어쨌든 글쓰기는 주제를 정하고 쓰는 것이고 답을 모르겠다가도 그 질문과 연관된 내가 알고 있는 걸 계속해서 써내려 가다 보면 갑자기 답이 툭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나도 모르게 내가 고민하고 있던 것의 해답이 되어주기도 했다.
예전에 한참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있었다. 그때는 내가 한창 20세기 영국에 빠져 있던 때였다. C.S. 루이스, J.R.R. 톨킨, 도로시 L. 세이어즈를 직접 보고 싶기도 하고, 마음 맞는 친구가 나랑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친구가 없고, 내가 너무 독특한 생각만 하고 산다는 생각이 들어 굳이 왜 이 시대에 태어나야 했는지 궁금해졌다. 풀리지 않는 질문이 생기면 항상 내가 했듯이 기도를 하고 또 살아갔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반짝 떠오른 생각이었던 것 같다. 별생각 없이 그 이후로 일주일을 보냈으니까). 일주일 뒤(내 기억상 그러한데), 그냥 읽고 싶어 집어 든 반지의 제왕에서 내가 물은 질문의 답이 나왔다.
“하지만 시대는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지 않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거야.”
-간달프
프로도의 (나랑 거의 맥락이 비슷한) 질문에 대한 간달프의 답이다. (정말 단어만 다르고 비슷한 내용의 질문을 책 속 주인공의 입에서 듣자, 그 질문의 답을 듣기 전 나는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머리를 한 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듯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하신 것은 다 이유가 있고, 하나님은 선하셔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었다. 이 말은 내 뇌리에 박혀 내가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말 중 하나다.가끔 의심이 들 때 아주 위안이 된다.
사실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가끔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야 할 때, 나조차도 보기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 때가 많고, 그럴 때 나도 내가 싫어진다. 그렇지만 그런 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더 노력하게 된다. 그런 내가 싫으니까. 내가 그것보다는 나은 사람이었으면 하니까. 그렇게 될 때 난 어제보다 더 좋은 나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게 하나님도 도와주실 것이다. 그래서 난 나를 발굴한다. 오늘도….
결국 “왜”라는 질문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다. 내가 왜 그렇게 말하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아냈기에 좋은 점은 더 발전시키고, 나쁜 점은 없애려 노력할 수 있었다. 내가 왜 이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확실히 알았기에 자신감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보았기에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도 예측하고, 내가 어떤 행동을 주로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질문을 많은 사람이 묻지 않기 때문에 MBTI 검사가 자기 본 모습과 다르게 나온다고 난 생각한다. 나라면, 내가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나의 모습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할 때 MBTI 검사가 제대로 나오겠지?)
내가 그때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해 보았기에 같은 상황이 닥치더라고 밀려오는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내가 그때 왜 슬펐는지 생각해 보았기에 남이 슬퍼할 때 공감할 수도 있었고 똑같은 상황에서 슬픔에서 빠져나오기가 더 쉬워졌다. 내가 왜 기뻤는지 알기 때문에 기분을 풀고 싶을 때 그렇게 행동하면서 기쁜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냥 내가 궁금했을 뿐이다. 사춘기 때 닥친 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왜 이러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나를 이해하게 되고 남도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앞에서는 가장 솔직해질 수 있었다. 내가 나를 아니까. 내가 이 부분에 취약하고, 연약하고 많이 아파한다는 걸 아니까. 남 앞에서는 괜찮다고 얘기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그냥 기분 좋은 척해도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난 아니까. 그래서 내 마음을, 너무 피곤해진 내 마음을 토닥토닥 잘 다독여 줄 수 있었다. 나도 위로가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앞에서도 더 정직해질 수 있었다. 그게 나였으니까.
“나는 왜…?”라는 질문은 인간으로서 한 번쯤 던져보면 좋을 질문이다. 결국 나를 아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니까. 나를 알면 남도 더 잘 알게 되고, 나를 잘 알면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나에게 좋은 처방을 해줄 수 있다. 어쨌든 나는 나니까.
그래서 난 오늘도 글을 쓰고 생각하고 책을 읽고 기도하며 나를 알아간다. 매일 새로운 모습의 나를 발견하게 되니 나를 다 알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난 나에게 묻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여쭌다. “왜…?” 바로 새로운 나를 알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