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반의 무의미함이 남긴 내면 디스크 정리 공식
아, 지금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구나.
최근 나는 이런 마음의 독백을 자주 한다. 방어기제가 단단한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면, 그의 눈빛은 이미 내 말을 튕겨 낸다. 방어기제는 스스로 자의식을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장치다. 문제는 그것이 타인의 의식을 수용할 여유를 가로막을 때다.
방어기제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방어기제는 외부 공격으로부터 자의식을 지키는 무의식적 보호 반응이다. 다만 무분별하게 날 선 방패를 거두지 못하면, 성장으로 이어질 피드백조차 칼날로 오해하고 쳐낸다.
첫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지 1년쯤 되었을 때다. 사수 박사님과 소장님의 피드백은 날마다 내 자료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열 번 준비한 자료가 한 마디에 부서지는 환경은 내 자존심을 갉아먹었다.
나는 끝내 소통의 문을 닫았다. “저도 나름으로 열심히 했어요.”라는 변명만 늘었다. 나중에는 질문을 던져 놓고서 “그건 박사님 생각이죠.”라며 벽도 세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방어기제의 위험성을 깨닫게 해 준 것은 퇴사 후 새 회사를 찾기 위해 이력서 앞에 다시 섰을 때였다. 이력서를 쓰다 보니 손에 쥔 결과물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2년 반을 무로 돌린 것은 ‘방어기제’였다는 것을.
방어기제를 버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주변의 영향에도 스스로가 흔들리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 '여유'가 필요하다. 여기서 필자가 고안한 하나의 내면 모델을 여러분께 공유하겠다. 바로 ‘의식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의 벽 : 인성·재능·전문성·재력 등 나를 구성하는 기둥.
- 각 기둥에 투자할수록 벽이 높아진다.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라는 물 : 나를 꽉 채운 신념과 자존심. 그릇 안에는 이 물이 차있다.
여유(Breadth of mind) : 물이 차오른 뒤 남는 부분.
- 타인의 의식이 들어올 자리 혹은 물이 출렁여도 넘치지 않게 해 줄 자리.
이런 그릇을 하나 상상한 후에 여유를 어떻게 늘릴지 생각해 보라. 단순하게만 생각해도 아래와 같은 전략들이 생각난다.
완벽한 모델은 없다. 나 역시 대입되지 않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그릇을 갈아엎고 다시 그린다.
당신만의 의식의 그릇을 한번 상상해 보라.
벽의 높이는 고르게 자랐는가?
자의식은 넘칠 만큼 차 있지는 않은가?
타인의 물 한 컵 정도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방어기제는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성장 기회를 가로막는 갑옷이 될 때, 우리는 자신을 가두게 된다. 벽을 높이거나 물을 비우거나, 방법은 다양하다. 결국 여유를 확장하는 선택이 방어기제를 내려놓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