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서사의 힘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는 산 정상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거의 정상에 닿을 때마다 바위는 굴러 떨어지고, 그는 다시 산기슭으로 내려가 처음과 같은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한다. 알베르 카뮈는 이 장면을 두고 말했다.
“시지프스가 바위 아래로 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 그는 자기 형벌의 의미를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
여러분은 살면서 부여했던 행동이나 생각의 의미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가? 혹은 어떤 일을 하고 난 뒤, 그 의미를 찾지 못해 깊은 고뇌에 빠진 적이 있는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의미를 재구성하지 않은 채 나아간다는 것은 ‘변화가 없는 나’를 허용하는 일이니까. 우리 삶도 때로는 끝없이 모래성을 쌓고 무너뜨리는 것처럼 변화가 없다고 느껴진다. 이런 반복 끝에 허무만 남을 것 같지만, 바로 그 지점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할 여백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처럼 의미를 끊임없이 빚어내려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삶에 강력한 ‘관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곧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과 같고, 그 궤도가 잡히면 한동안 같은 속도로 여정을 이어갈 동력을 얻는다. 만약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어떨까? 의미가 없는 상태는 마치 빈 캔버스와도 같다. 크기도 방향성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막막하고 헤맬 수 있지만, 반대로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의미는 단순히 주어진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꾸려나갈지 선택하고 ‘창조’ 해 나가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스스로 창조해 낸 이야기는 왜 우리에게 이토록 중요할까? 그 답은 우리 뇌의 작동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뇌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와 실제 행동의 방향성이 일치할 때 안도감을 느끼고, 어긋날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즉, 내면의 지향점과 외부 행동이 일치할 때 안정감을 느끼며, 이러한 일관된 방향성이 모여 ‘나’라는 사람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저마다의 나침반을 끊임없이 재점검하며, 새로운 좌표와 의미를 빚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찾는 모든 의미가 모두에게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내가 걷는 길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검토받고 일일이 지정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만의 방식과 생각으로 도달한 의미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설령 그것이 나만의 합리화일지라도 내 무거운 걸음을 보조해 줄 지팡이가 되어 준다면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의미는 딱히 대단하지도, 누구나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야말로 나만의 독자적인 생각에서 나온 보석과도 같은 부산물이니까.
물론, 살아가면서 우리의 생각이나 지향점이 변화함에 따라 기존의 의미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잠시 길을 잃은 듯한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인생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이고, 우리가 걷는 여정에 예상치 못한 벽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막힌 길목에서 우리는 벽을 돌아갈지, 혹은 다른 항로를 택할지 등 앞으로의 행보를 다시 한번 조정하게 된다. 이 조정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한 단계 성장하게 되며, 이는 곧 새로운 관성을 창조하는 경험이 된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다시금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의미를 빚어내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과 함께 자신의 서사를 다시 써 내려가는 과정 자체가,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등불’을 손에 쥐는 여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