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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Sep 17. 2021

복기(復棋)

복기(復棋): 한 번 두고 난 바둑을 검토하기 위해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보는 것.


회사 동기 하나가 나보고 ‘취미 부자’란다. 본인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취미가 많다나. ‘취미’라는 단어를 사전에 검색해보니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나온다. 내 ‘행위’들의 목적은 사실 ‘즐기기 위함’보단 ‘넘치는 시간을 죽이기 위함’에 더 가까운데. 특정 행위가 가져다주는 순수한 즐거움을 느껴본 지는 꽤나 오래되었지만, ‘취미’라는 단어 말곤 딱히 그 행위들을 설명할 단어가 떠오르질 않으니 일단은 취미라고 해야겠다. 조금은 부끄럽다.


딱히 이것을 자랑스레 여기진 않지만,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내 취미들은 타인의 기준에서 굉장히 높은 수준에 이르러있다. 거의 모든 취미들이 semi-pro 수준이고, 프로만큼 잘하는 것도 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저 '타고나서’ 혹은 ‘머리가 좋아서’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외려 나는 대부분의 분야에 재능이 없어서, 취미들을 능숙하게 하기 위해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방에 틀어박혀 어떡하면 이것들을 잘할 수 있을까 방법을 고민하고, 수정하고, 다시 고민하고 수정하며 32년 평생을 보냈다. 다만 내가 남들보다 재능 있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복기'였다.


바둑을 처음 배우고, 내 바둑이 어설프게나마 '돌 따먹기’ 대신 '땅 따먹기’의 형태를 띠어 갈 때 즈음, 복기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복기하기를 어려워하던 것과 달리, 나는 굉장히 쉽게 이를 해내었다. 한 판의 바둑을 두고 나면, 거의 완벽하게 모든 돌이 놓인 순서를 기억했다. 두었던 바둑을 다시 놓아보며 나와 상대방의 의도를 되새김질하고 참고도들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지루해하기만 하던 ‘복기’의 과정이, 내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외려 죽은 바둑에서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는 즐거움이 더 컸달까. 그 덕분인지, 내 바둑 실력은 상당히 빠르게 늘었고, 그래도 기원에서 꽤나 실력 좋다는 아저씨들과 치고받을 수 있는 기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온갖 취미들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게임을 한 판 하고 나면, 특정 순간에 내가 내렸던 선택들을 되짚어보며 더 좋은 선택지는 없었을지 생각했다. 노래를 부르거나 피아노를 칠 때면, 이를 영상으로 저장해놓고 하루 종일 들으면서 어떤 식으로 음을 내야 아름답게 곡을 노래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최근에 시작한 골프도, 함께 치는 친구는 대체 이걸 왜 계속 보냐며 한 소리 하지만, 연습장에서 찍은 영상을 스윙 한 번, 한 번마다 잘라놓고 프레임별로 돌려가며 내 스윙을 되돌아본다. 아쉽게도 비루한 운동신경 덕에 아직 내 인식과 실제 움직임 간의 괴리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이전보다는 나아진 것이 눈에 보인다.


이 습관은 취미에 국한되지 않고 내 삶을 복기하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하루를 보내며, 가령 다른 사람과 대화를 했을 때 혹시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어휘를 선택하지는 않았는지부터, 한 달, 일 년, 그리고 평생을 돌이켜보며 어떤 선택이 나를 좀 더 행복하게 만들었을지 따위를 고민한다. 대부분은 바보 같은 선택을 후회하는 나날들을 보내지만, 가끔은 내 남은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 깨달음들도 오곤 하니 어느 정도는 수지타산이 맞는다고 해야겠다. 분명 오늘도 후회스러운 선택들로 가득하겠지만, 죽어버린 시간에서 나를 찾으러 방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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