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위의 학생, 학생 잡은 교수, 서로 싸운 교수
발단
<에티켓과 매너, 그리고 예의범절>이란 제목의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수업시간은 3:00 ~ 4:50 PM인데 그날따라 강의가 길어져 50분에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내 강의 뒤에는 수업이 없으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강의실 벽시계가 55분을 가리키도록 수업을 이어갔다.
그때, 학생으로 보이는 한 젊은이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출입구는 강의실 앞쪽에 있어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는 실내를 한번 쓰-윽 둘러보더니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그냥 나간다.
수업 중인 줄 모르고 잘 못 들어온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강의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비록 모르고 저지른 실수라 할지라도 저런 경우 사과 한마디 없이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요?"라고 말했더니 학생들이 까르르 웃었다.
한 2분 후에 그 친구가 다시 들어왔다. 이제는 내가 못 참겠다.
"자네 뭐야?!"
"학생입니다."
"왜 또 들어왔어?"
"다음 수업시간이 다 되어서 빨리 좀 마쳐야겠는데요."
나 역시 의대에서 강의하러 가면 간혹 앞의 강의가 끝나지 않아 밖에서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화는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업 중인 강의실에 들어가서 빨리 마치라는 말을 한다는 건
교수인 나도 상상을 못 할 일이다. 그러니 내가 꼭지가 돌 수밖에.
"뭐야? 교수가 강의하고 있는 강의실에 학생이란 놈이 들어와서 교수보고 수업 빨리 마치라고?
야이 썅! 수업은 내가 알아서 마쳐. 빨리 나가라우!"
전개
그날따라 부산에서 김해까지 오는 동안 차가 밀려 여유 없이 도착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학과 사무실에 가서 출석부만 챙겨 나오고 뒤에 수업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아무튼, 본의 아니게 다음 시간 강의할 교수를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다.
강의 마치면 그 교수에게 사과해야겠다 하고 서둘러 수업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친구 하나가 똥 밟은 얼굴로 떡 하니 버티고 서있다.
그리곤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강의는 제시간에 마쳐야 할 것 아닙니까?" 하고 언성을 높인다.
"정말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쳐드렸네요. 안 그래도 사과할 참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도 이 친구 전혀 굽히지 않고 거의 삿대질하듯 팔을 들썩이면서 "수업 늦게 마치면서 죄 없는 학생에게 왜 그래요?" 하며 눈을 부라린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나오다 호기심과 걱정 어린 눈길로 기웃거리기 시작하니 이젠 아예 내 소매를 잡고 끌면서 "밖에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한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이야기지비!
이제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남과 동시에 내 내면에 잠자고 있던 '헐크'가 무섭게 요동치면서 모든 신경세포에 '전투 모드로의 전환'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결투
@백경의 싸움 법칙 1: 몰상식하고 거칠게 나오는 상대는 더 거칠게 몰아붙여라.
이런 자들은 신사적으로 나오면 상대를 얕잡아보고 더 날뛰는 법이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나는 먼저 바바리를 벗어 벤치에 탁 던진 후, 양복 상의 단추를 풀어 재꼈다.
얼굴은 분노의 표정근을 총동원하여 분기탱천(憤氣撐天), 두 눈은 레이저 빔을 쏘듯 섬광분출(閃光噴出), 목소리는 단전에서 기를 끌어올려 뇌성벽력(雷聲霹靂) 모드로 무장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의과대학의 한 교순데 실례지만 선생님은 무슨 과 교수시오?"
"00과 ㅎ교숩니다. 학과장이고요."
푸하하, 돌아가면서 하는 학과장이 무슨 큰 벼슬이라고 그걸 내 앞에서 들먹거려? 참 국산품도 가지가지네.
"그런데 죄 없는 학생이 어쨌다는 겁니까?"
"학생이 그 교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합디다. 그 학생이 누군지 알아요? 이사장님 손자란 말입니다."
아 하~~ 이제야 알겠다. 이 친구가 그만한 일로 왜 이리 성난 멧돼지처럼 씩씩대는지. 그에게는 내가 수업 늦게 마친 것보다 이사장 손자가 당한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백경의 싸움 법칙 2: 상대의 약점이 노출되는 순간, 바로 물어뜯고 흔들어라.
이제 물어뜯을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거기다 나이 빨로 깔아뭉개기로 하고 말을 까다시피 했다.
"이사장 손자? 이 장면에서 이사장 손자가 왜 나와요? 야이썅, 이사장 손자면 교수 앞에서 제 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이야기야 뭐야?"
이 친구,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한 풀 팍 꺾이면서
"그게 아니고.., 그 학생은 외국에 오래 살다 와서 한국실정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아니, 한국 실정 모르는 놈은 한국 와서 제멋대로 해도 상관없단 이야기요 뭐요?"
"그게 아니고, 그 학생은 한국말도 잘 모르고 …."
"한국말도 잘 모르는 놈이 교수에게 수업 빨리 마치라는 말은 어떻게 해요?"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그는 점점 코너에 몰리면서 꼬리를 내린다.
"저는 교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다만 학생이 들어갔다 나와서는 하도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기에…"
이 친구, 완전히 비 맞은 강아지상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물고 흔들 차례.
표정은 험상궂게, 목소리는 더 높이면서
"그래요? 교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럼 내 설명해 드리리다."
하고는 교실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곤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님 같으면 강의 중에 들어와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런 실례를 범하는 학생을 용납하겠어요?’
그는 이제 얼굴에 비굴한 웃음까지 띠고 두 손으로는 내 소매를 잡으면서 살랑거린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는 다만 교수님이 너무 화가 나신 것 같아 화 푸시라고 그 학생 사정을 설명해 드린 것뿐이니 오해 마십시오. 죄송합니다."
@백경의 싸움 법칙 3: 싸움을 끝낼 타이밍을 잘 잡고, 마무리는 깔끔하게.
이제 전투를 종료해야 할 시점. 더 길게 가져가면 서로 치사해지고, 쥐도 막다른 골목으로 몰면 고양이를 무는 법.
"알았어요. 이제 그만합시다. 내가 본의 아니게 수업 늦게 마친 점,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하고는 바바리 집어 들고 돌아섰다.
뒷맛
운전하며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씁쓸했다.
이사장 손자라? 그게 교수에게 왜 중요한가?
물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관의 어른은 당연히 잘 모시고 잘 받들어야 한다.
하지만, 학생은 학생일 뿐이고 가르칠 대상일 따름이다.
그 대상의 신분에 따라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저 친군 교수란 자가 왜 저래?
한 편으론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다.
내가 출석부를 반납하기 위해 학과 사무실에 가서 그 교수와 그 과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그 과목이 작년까진 전공필수였는데 올해부터 전공선택으로 강등되었단다. 그러니 불안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학문과 진리의 전당이라 할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치사하게 이사장 손자 비위나 맞추면서 비굴하게 자리보전에 연연해야 할까?
회상
위의 이야기는 며칠 전, 다른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다 우연히 걸려든 글로서 2012년 10월 25일 블로그용으로 써놓은 글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글을 대하는 순간 그날 장면이 그대로 떠오르는데 "그때 내가 저랬나?" 싶은 게 재미도 있고 웃음도 나는데 그런 한편으론 후회와 반성이 뒤따른다.
지금 돌이켜보니 두 사람 다 충분히 이해해 줄 만한데 그때 내가 왜 그렇게까지 심하게 대했을까?
우선 학생의 입장부터 살펴보자.
그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란 아이다.
수업하러 학생들과 교수가 교실에 다다랐는데 문이 닫혀있어 못 들어가고 있으니 '이 무슨 시추에이션?' 하며 문을 열어 볼 수도 있지 않았겠나.
그러고 나왔는데, 그래도 수업을 안 마치니 다시 들어와 (다들 밖에서 기다리니) 수업 좀 빨리 마쳐달라고 한 게 뭐 잘못됐나? 오히려 용기 있는 행동 아닌가?
그런데 돌아온 건 천둥소리같이 강력하게 진동하는 "야이썅!"이란 이상한 말.
험상궂은 표정에, 난생처음 듣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언어를 내뱉는 사람!
어쩌면 그는 나를 아프리카 식인종 추장쯤으로 생각하고 당황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저녁 백씨 가문 식탁 위에는 백경이란 이름의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중앙에 놓이고 다들 한 젓가락씩 하며 잘근잘근 씹어댔겠지? ㅎㅎ.
그 소리 듣고 이사장님은 어떤 표정으로 뭐라 그랬을까?
나를 그리 아끼고 사랑하여 나만 만나면 항상 흐뭇한 미소를 띠며 자애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밀어주던 분이셨는데…. 이젠 이 세상에 없으니 그리워진다.
이번엔 그 교수의 입장이 되어보자.
내가 가장 열받은 것은 교수의 입에서 '이사장 손자'란 말이 나왔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의대 교수는 잘려서 나오든 빡쳐서 나오든, 교수직 때려치우고 밖에 나오면 자신의 네임벨류 이마빡에 붙이고 의사 짓 하면서 교수 때보다 훨씬 돈 많이 받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인문계열 교수는 일단 교수란 딱지 떼고 밖에 나오면 어디 가서 무얼 해 먹고살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나라도 당장 내 가족이 굶어야 할 처지에 놓인다면 가장으로서 무슨 짓인 들 못할까?
그러니, 자신의 명줄을 쥐고 있는 이사장의 손자가 자기 과 학생으로 들어왔다면 업고라도 다니고 싶지 않겠나? 그 입장 왜 헤아려주지 못했을까?
그리고 나는 또 뭘 그리 잘했누?
이 사단의 발단이 다 누구 때문이고?
무슨 핑계를 댄다 하더라고 다 내가 잘못해서 그리 된 것 아니가?
그러면 마~ 대구리 푹 숙이고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그냥 가면 되지
뭘 잘했다고 핏대 올려가며, 애먼 사람들 자존심 팍팍 밟아가며, 꼭 그렇게 이겨야만 했나?
지나고 보면 다 우스운 일인데 막상 닥치면 나이 60이 다 되어서도 저렇게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그대로 분출하고 마니... 역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마음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나마 이런 뒤늦은 반성이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인데, 이런 걸 생각하면 사람이 조금은 오래 살 필요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