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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15 조숙한 아이의 수난

조선 야담(冶談)

by 한우물


2023년 6월 28일


아침에 병원에 출근해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나면,

숭늉처럼 묽게 내린 드립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 오전 내내 한 모금씩 홀짝홀짝 마신다.


커피를 내리고 병에 따르고 하는 과정에 한 번씩 신경 쓰이는 게 두 가지 있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법한 기다란 커피포트 주둥이와 위태로워 보이는 보온병의 높이-


20230627_082924.jpg


'커피를 내린 후, 저 비커(beaker)에 든 커피를 보온병에 따를 때 보온병이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뜨거운 물을 보충할 요랑으로 저 기다란 주둥이를 가진 주전자를 들고 보온병에 따르다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이런 우려 때문에 뜨거운 물이나 커피를 따를 때는 보온병을 왼손으로 잡아 책상 아래로 내려 조심스레 따랐고 이런 방법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커피를 따르는 중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 소리에 잠시 한눈을 팔다 그만 뜨거운 커피를 손등과 옷소매에 흘리고 말았다.


"앗 뜨거!"


급히 사태를 수습하는 와중에, 내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에이 씨, 0 000 0 00 00 0 00 0 000!"


500년 전, 조선시대


산골에 한 가난한 부부가 살았다.

허름한 초가집에 방은 한 칸 밖에 없었다.

산골 초가.jpg 사진 출처 -Daum 중년카페-


즐길거리라고는 없는 그곳에서 낙이라고는 오직 하나. 그리고 산골에는 밤이 일찍 찾아온다.

그 결과, 자연스레 자식이 태어났다.


아이가 어릴 땐 아무 문제없었다.

애들은 한번 잠들면 세상모르고 자다 보니 캄캄한 밤에 아비가 자신의 머리맡을 돌아 야행(夜行)을 다녀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아비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 아이는 어느덧 일곱 살이 되었다.

이제, 밤이 되면 아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아이가 얼마나 깊이 잠들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걸 모르고서는 그날 밤에 치를 거사(巨事)의 플랜을 짜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잠깐 내리다 지나가는 일과성 소나기로 치러?

아니면,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동반한 집중호우로 몰로가?'


그 테스트 방법에 골몰하던 남편은 드디어 멋진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냈다.

자는 아이의 얼굴에 촛불을 갖다 댔을 때 눈을 깜박이는 정도를 보는 것이다.


촛불 앞에서도 전혀 눈을 깜빡이지 않을 정도면 천둥 번개가 쳐도 모를 것이라 여겨 그런 날은 부부가 마음껏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따라 회가 동한 남편이 일어나는 춘정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촛불로 아이를 시험하였다.

그런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들고 있던 촛대가 약간 기울어져 촛농 한 방울이 그만 아이의 얼굴에 떨어지고 말았다.


"앗 뜨거!" 하며 벌떡 일어난 아이는 아비를 향해 가재비 눈을 하고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에이 씨, 내 언젠가 한 번은 이런 꼴 당할 줄 알았다!"




그날, 내 입에서는 위와 똑같은 말이 나왔다.

젊은 시절, 친구나 동료들과의 야음(夜飮) 시간에 화젯거리가 떨어지면 이 이야기를 종종 써먹다 보니 뜨거운 커피에 손을 데이자 입에 익은 그 말이 그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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