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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Jan 18. 2024

강27 꿈의 무대

실전에피소드 03

생애 최고의 무대 


#2019-03-31 발표 당일

이날 심포지엄은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해서 9시 30분에 첫 강의를 마치고 바로 연이어 내 강의가 시작된다. 이렇게 되면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점검해 보아야 할 여러 가지 사항을 체크해 볼 여유가 전혀 없다. 방법은 하나. 첫 시간 시작하기 전에 가서 미리 점검하는 것.     


아침을 먹고 난 후 지하에 있는 강연장으로 내려간 시각은 7시 55분. 

리셉션 데스크에는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낸 제약회사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제 일착으로 접수를 마치고 나자 내가 오늘의 연자임을 알아본 회사 간부들이 줄줄이 와서 명함을 건네며 정중히 인사를 한다. 


아직 아무도 접수하지 않았는데, 제1 연자도 아직 안 왔는데, 1시간 반 후에나 시작할 제2 연자가 꼭두새벽부터 제일 먼저 등장하니 약간은 의아한 표정들이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워커힐호텔 시어터홀WalkerhilHotel Theater Hall -     

한국에 살면서 이제껏 한 번도 구경해 본 적 없는 말로만 듣던 꿈의 무대!

그 웅장함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어떤 곳이던가?

1973년 선경개발(현 SK그룹)이 정부로부터 워커힐을 인수한 후, 1978년 동양 최대의 호텔공연장인 '가야금 극장식당'을 만들어 그 유명한 '워커힐 쇼'를 2012년까지 무려 35년간이나 이어온 유서 깊은 한국 최고의 공연 무대 아니던가.


공연을 감상하기에 최적화된 계단식 홀에 격조 있는 실내 분위기, 그리고 무대 뒤편에 설치되어 있는 초대형 스크린 위에서 돌아가는 영상물과 음악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영상물이 주가 되는 영상의학과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는 화면의 크기와 빔프로젝터의 성능이다.

내가 가장 반한 것은 바로 저 엄청난 크기의 스크린. 이렇게 큰 스크린은 난생처음 보았다.    

내 입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래, 바로 저거야! 스크린이 저 정도는 돼야지."   


내가 꿈꾸어 왔던 그 거대한 스크린 위에 내가 제작한 영상물이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리허설     


이제 리허설을 시작할 시간이다.

무대 하단 좌측에는 강의용 영상물 담당 직원과 전체 진행을 맡은 손 과장이 있고, 무대 오른쪽 맞은편 홀 끝 2층에는 음향 및 조명담당 기사가 있다.          


먼저, 내가 발표할 PPT부터 확인할 차례.        

나는 객석 뒤편 중간에 서서 영상물 담당직원에게 말했다.

"자, 첫 슬라이드 비춰보세요."          


그런데 배경색이 다르다.

"으잉? 이거 뭐야? 내가 준 것 맞아요?"

그랬더니 담당자는 "아, 죄송합니다." 하고는 다른 영상물을 올린다.

인쇄용으로 보낸 파일을 발표용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번엔 맞다.

확인 안 했으면 큰일 날뻔했다.

이런 것이 바로 리허설의 힘이다.          


"다음, 다음, 계속 넘기고…."          


"무대 쪽 조명 좀 낮추세요. 그렇지! 그리고 객석 조명도 낮추고. 좀 더~, 오케이.“


"첫 번째 연자 슬라이드는 거의 모두 텍스트로 되어있을 거니까 조명을 밝게 해도 상관없는데, 내 경우는 달라야 합니다."


"내 인사말이 끝나고 나면 먼저 무대 쪽 조명을 완전히 끄고, 초음파 사진이 나오기 시작하면 홀 쪽 조명도 앞쪽은 다 꺼야 합니다. 다들 아시겠죠?"          


"이제 동영상을 확인해야 하니 아홉 번째 슬라이드 보여주세요."     


"거기서 클릭!"          


그러자 PPT 속에 삽입한 동영상이 잘 돌아가고 영상 속의 내 음성도 잘 나온다.    


"자~, 이제 영상물 볼륨 조절합시다."


내가 객석 제일 뒤쪽에 서서 지휘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조명을 어느 정도 낮추었을 때 초음파 영상이 가장 잘 보이는지.

동영상 볼륨을 어느 정도 올렸을 때 영상 속 목소리가 제일 뒷좌석까지 잘 들리는지.

이 두 가지를 체크하기 위함이었다.


"오케이, 동영상 볼륨은 이 레벨에서 고정하세요."          


충분히 만족했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PPT 영상이 고성능 빔프로젝터를 통해 초대형 스크린에 선명하고 칼러풀하게 투영되는 모습을 관중석 끝에서 보고 있노라니 참말로 장관이었다.


이만하면 영상물 점검은 됐고, 이제 마이크와 노트북을 점검할 차례

그러려면 무대로 올라가야 하는데 방법은 두 가지. 무대 정면 계단으로 바로 올라가는 것과 홀 측면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


장애인인 내가 정면으로 올라가는 것은 볼썽사나우니 측면 계단으로 올라가자.          

눈에 띄는 직원 한 사람을 불렀다.


"내가 계단을 오를 땐 나보다 먼저 올라가 내 왼손을 잡아서 끌고, 오른 후에는 내 뒤를 따라오고, 내가 연단에 도착하면 이 지팡이 받아서 내려가세요.“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다시 올라와 지팡이를 전해준 후, 나보다 앞서 나아가면서 한 계단 아래에서 내 왼손을 잡아 주세요. 이것이 오늘 그대가 할 임무입니다. 아시겠죠?"   


연단에 도착 후, 먼저 노트북을 점검했다.

내가 요구한 것은 15인치 이상 되는 모니터를 장착한 것이었는데 17인치짜리로 준비해 놓았고 돌려보니 잘 돌아간다.  

        

마지막으로 마이크 테스트.

연단에 서서 강의를 하는 사람에게 마이크는 생명줄이나 같다.

노래하는 가수와는 달리, 연자의 마이크 세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자의 말이 또록또록하게 전달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런 연후에, 듣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약간의 화장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에코를 최대한 줄여 민낯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경우 트레블(treble)을 내리고 베이스(bass)를 약간 올리며, 나처럼 중저음에 기름진 목소리에는 트레블을 올리고 베이스를 낮춘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 맞게 이쿠얼자이져 밴드(equalizer band)를 맞추고 최후로 에코를 약간 넣는다.   


"아~~ 아~~, 테스팅, 테스팅,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제일 뒤에, 잘 들려요?"    

 

이번엔 혀를 말았다 풀면서 "똑/록, 똑/록."하고 소리를 내어본다.   


그러고 보니 지난 세월 나는 마이크와 함께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 시절 동안은 통기타 듀엣으로, 그룹사운드 싱어로 음악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았고, 교수 시절 35년 간은 연단에서 연자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래서 안다. 

"아~~ 아~~, 테스팅, 테스팅" 하는 순간, 되돌아오는 내 목소리가 어떤지 보면 바로 감이 오는 것이다.     

완벽했다. 


과거, 그 없던 시절, 외국 관광객 하나라도 끌어들여 달러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만들었던 한국 최고의 쇼 공연장 명성에 걸맞게 사운드 시스템도 끝내줬다.

더 조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시마이!"       

   

이것으로 무대에 오를 자가 해야 할 준비는 다 끝냈다.

하나 남은 것이 있다면 내 앞의 연자가 하는 강의를 보고 들으며 마이크와 입과의 적정 거리를 생각하고, 관객의 입장이 되어 그의 표정과 제스처 등을 관찰하고 참고하는 일이다.


또다시 스테이지맨의 피가 끓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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