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에피소드 02
제목의 차별화
이제 제목을 정할 차례다.
다른 연자들의 제목은 하나같이 의학용어가 포함된 영어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내 강의 차례에 와선 ‘Special Session’, 즉 ‘특별강연시간’이란 머리글 하에 회사에서 임의로 정해 온 가제(假題)로 ‘복부초음파’란 뜻의 ‘Abdominal Ultrasound’라고 써 놓았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책을 한 권 출간하면서 그때까지 몰랐던 사실 하나!
'무명작가의 책 제목은 작가가 정하지 못한다.’
정작 책을 쓴 사람은 제 책의 제목도 못 정하고, 그 제목은 오로지 출판사의 몫이라니!
'뭐 이런 엿같은 일이 다 있냐? 싶은 게 참으로 황당했다.
그 결과, 나의 책 제목도 내가 10년 이상 강의 제목으로 써왔던, 그래서 더더욱 애착이 갔던 제목 '사람의 얼굴이 전하는 메시지'에서 '의학박사 한상석 교수의 얼굴특강'으로 허무하게 바뀌었다.
그때의 그 상실감이란...
그런데 이제 나의 강의 제목을 내가 정할 때가 왔다.
오랜만에 내 손에 칼이 쥐어지고, 그 칼을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나의 시간이 온 것이다.
‘Abdominal Ultrasound’
요놈의 제목을 어떻게 칼질할까?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과 차별을 두면 된다.
다른 연자들이 폼나게 외국어로 제목을 붙였다면 나는 촌스럽게 한글로 쓰는 거다.
다른 연자들은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분명한 메시지의 제목을 붙였다면 나는 약간 몽롱한 제목을 붙여 한 번 더 생각게 만드는 거다.
제목이 떠올랐다.
볼펜을 들었다.
갑과 을이 확실하게 뒤바뀌는 순간, 업체가 정해온 영어 제목을 화~ㄱ 긋고, 그 위에 거의 암호 수준에 가까운 나의 악필로 다음과 같이 휘갈겨 썼다.
캬~, 이때의 괘감이란!!!
내가 정한 내 책 제목이 속절없이 잘려나갈 때 당했던 설움을 이 한 방에 다 날리는 것 같았다.
내가 내 마음대로 제목을 정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실감이 났다.
역시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일을 할 때 가장 큰 힘이 실리는 모양이다.
호칭의 차별화
이제 호칭 문제가 남았다.
그쪽에서 써 온 나의 소속 및 호칭은 '한상석 선생님(한사랑내과병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교수님인데 나만 선생님으로 붙이기가 좀 거시기했던지 직원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선생님 이름 아래에 전(前) 인제의대 교수라고 써넣을까요?'
"마~ 됐심다. 뭘 그런 구질구질한 걸 써넣어?"
"그럼 선생님 대신 과장님이라 쓸까요?"
"없~시더. 난 선생님이란 말이 더 좋아요."
차별화를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제목이 구별되고, 소속 병원도 구별되고, 연자의 호칭도 구별되면 내가 의도하는 바는 다 이루게 되는 것이다. 또다시 상상의 나래가 절로 펴졌다.
초청장을 받아 든 내과 의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다.
팸플릿의 내지(內紙)에 인쇄된 아래와 같은 Agenda(일정)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제일 눈에 띄는 건 'Special'이라는 단어와 한글로 된 '초음파'란 단어일 것이다.
그리되면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겠지.
-이거 구미 당기는데, 누가 강의하나? 어디 보자…, 연자부터 좌장까지 모조리 내과 교수들인데 이 사람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병원에다 과장도 아니고 그냥 선생이네? 이름도 처음 듣는 이름이고. 이 양반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내과 의사 맞나?-
그러면서 그들은 '이거 들으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겠지만 서울까지 올라와서 가장 관심이 많은 초음파 강의를 빼먹고 갈 수도 없고. 거-참.
이런 생각을 하니 깨소금 맛이 따로 없다.
내가 즐기는 것 중 하나는 남의 의표(意表)를 찌르는 것.
그리하여 내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는 상대의 나에 대한 그 낮은 기대감을 확 까부수는 것.
이제, 별볼일없어 보이는 촌구석의 이름 없는 서생 하나가 100명이나 되는 내과 원님들을 놀래킬 일만 남았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표제사진 출처 : -i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