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우물 Jan 15. 2024

강26 제목에 칼질하는 쾌감

실전에피소드 02

제목의 차별화     


이제 제목을 정할 차례다.

다른 연자들의 제목은 하나같이 의학용어가 포함된 영어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내 강의 차례에 와선 ‘Special Session’, 즉 ‘특별강연시간’이란 머리글 하에 회사에서 임의로 정해 온 가제(假題)로 ‘복부초음파’란 뜻의 ‘Abdominal Ultrasound’라고 써 놓았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책을 한 권 출간하면서 그때까지 몰랐던 사실 하나!      

'무명작가의 책 제목은 작가가 정하지 못한다.


정작 책을 쓴 사람은 제 책의 제목도 못 정하고, 그 제목은 오로지 출판사의 몫이라니!

'뭐 이런 엿같은 일이 다 있냐? 싶은 게 참으로 황당했다. 


그 결과, 나의 책 제목도 내가 10년 이상 강의 제목으로 써왔던, 그래서 더더욱 애착이 갔던 제목 '사람의 얼굴이 전하는 메시지'에서 '의학박사 한상석 교수의  얼굴특강'으로 허무하게 바뀌었다. 

그때의 그 상실감이란...    


그런데 이제  나의 강의 제목을 내가 정할 때가 왔다.

오랜만에 내 손에 칼이 쥐어지고, 그 칼을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나의 시간이 온 것이다.     


‘Abdominal Ultrasound’ 

요놈의 제목을 어떻게 칼질할까?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과 차별을 두면 된다. 

다른 연자들이 폼나게 외국어로 제목을 붙였다면 나는 촌스럽게 한글로 쓰는 거다.

다른 연자들은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분명한 메시지의 제목을 붙였다면 나는 약간 몽롱한 제목을 붙여 한 번 더 생각게 만드는 거다.     


제목이 떠올랐다.

볼펜을 들었다.

갑과 을이 확실하게 뒤바뀌는 순간, 업체가 정해온 영어 제목을 화~ㄱ 긋고, 그 위에 거의 암호 수준에 가까운 나의 악필로 다음과 같이 휘갈겨 썼다.          


캬~, 이때의 괘감이란!!!     


내가 정한 내 책 제목이 속절없이 잘려나갈 때 당했던 설움을 이 한 방에 다 날리는 것 같았다. 

내가 내 마음대로 제목을 정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실감이 났다. 

역시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일을 할 때 가장 큰 힘이 실리는 모양이다.     


호칭의 차별화


이제 호칭 문제가 남았다.

그쪽에서 써 온 나의 소속 및 호칭은 '한상석 선생님(한사랑내과병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교수님인데 나만 선생님으로 붙이기가 좀 거시기했던지 직원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선생님 이름 아래에 전(前) 인제의대 교수라고 써넣을까요?'      

"마~ 됐심다. 뭘 그런 구질구질한 걸 써넣어?"


"그럼 선생님 대신 과장님이라 쓸까요?"

"없~시더. 난 선생님이란 말이 더 좋아요."

 

차별화를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제목이 구별되고, 소속 병원도 구별되고, 연자의 호칭도 구별되면 내가 의도하는 바는 다 이루게 되는 것이다. 또다시 상상의 나래가 절로 펴졌다. 


초청장을 받아 든 내과 의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다.
팸플릿의 내지(內紙)에 인쇄된 아래와 같은 Agenda(일정)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제일 눈에 띄는 건 'Special'이라는 단어와 한글로 된 '초음파'란 단어일 것이다. 

그리되면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겠지.


-이거 구미 당기는데, 누가 강의하나? 어디 보자…, 연자부터 좌장까지 모조리 내과 교수들인데 이 사람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병원에다 과장도 아니고 그냥 선생이네? 이름도 처음 듣는 이름이고. 이 양반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내과 의사 맞나?-


 그러면서 그들은 '이거 들으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겠지만 서울까지 올라와서 가장 관심이 많은 초음파 강의를 빼먹고 갈 수도 없고. 거-참.

이런 생각을 하니 깨소금 맛이 따로 없다.


내가 즐기는 것 중 하나는 남의 의표(意表)를 찌르는 것.

그리하여 내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는 상대의 나에 대한 그 낮은 기대감을 확 까부수는 것.


이제, 별볼일없어 보이는 촌구석의 이름 없는 서생 하나가 100명이나 되는 내과 원님들을 놀래킬 일만 남았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표제사진 출처 : -iStock

이전 25화 강25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