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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Jan 12. 2024

강25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다

실전에피소드 01

지금까지 지난 40년간의 강의경력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필자 나름대로의 강의 노하우를 피력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들 기법이 실전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필자의 한 초청 강연 에피소드를 통해 리뷰해 보자.


# 2019-02-19

처음 듣는 제약회사 직원이 서울에서 찾아왔다.

용건은 그 회사에서 주최하는 심포지엄에서 초음파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이 은퇴한 늙다리를 찾아왔을까?


사연인즉슨,

초음파를 직접 하는 내과 의사 중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대구의 김일봉 원장을 찾아갔더니 자신은 그날 다른 일정이 잡혀있어서 안 되고, 대신 좋은 분을 소개해 주겠다면서 나를 강력하게 추천했단다.

서울에서 대구를 향해 큐대를 휘둘렀는데 그 공이 그만 대구에서 히네루(spin)를 먹고 부산으로 튕겨온 것이다.


먼저 심포지엄 전체 일정 및 연제들을 보자고 했다.


일정은 3월 30일 저녁에 서울에 있는 한 호텔에서 50분짜리 강의 두 개를 듣고 난 후 그 호텔에서 하룻밤 묵은 뒤 다음날 오전에 또 두 연제를 듣는, 이름하여 Overnight Symposium이라는 것으로 짜여 있었고, 연제는 전부 GERD(Gastro-Esophageal Reflux Disorder), 즉 ‘위식도역류성질환’의 최신 지견 및 치료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거, 보아하니 세미나 주제가 GERD인 모양인데 이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초음파를 왜 넣으려고 그래요?”

“아, 네. 준비 과정에서 여러 선생님이 초음파 강의 하나쯤 꼭 넣어주면 좋겠다고 해서요.”


“대상이 누군데요?”

“대부분 내과 개원의 선생님들로서 전국에서 약 100명 정도 초대할 예정입니다.”


이제 감이 잡혔다.

요즈음 병원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데, 최저임금 상승 탓에 올해는 중소종합병원들도 존폐의 갈림길에 빠졌다는데, 대학병원에서는 내과 지원자가 적어 레지던트 정원도 잘 못 채우는데, 개업의들이야 오죽하겠나?

내시경이라도 하나 넣고 수입 좀 올리자니 나 홀로 개원의가 무슨 배짱으로 수면내시경의 사고위험 부담을 감당하겠나?


그러니 마침 잘됐네.

작년부터 복부초음파가 본격적으로 건강보험에 편입되었으니 빚을 내서라도 초음파 기계 한 대 집어넣고 이거라도 열심히 배워서 먹고살자!

게다가 '역류성식도염'이라면 내과 전문의 치고 모르는 사람 어데 있노? 그라이 마~, 돈 안 되는 약 처방에 필요한 최신지식보다 그나마 많이 하면 돈 좀 되는 초음파에 대해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이 훨씬 영양가가 높다, 뭐 이런 말씀 아니겠나.


회사는 또 어떻누?

주로 위장관 계통 치료제를 생산 판매하는 회사다 보니 울트라사운드(Ultrasound, 초음파)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던 그들로서는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난 것이다.


GERD 분야에서 이름난 내과 교수 몇 명만 섭외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이 행사에 참가할 자사(自社) 제품의 User이자 Buyer들의 마음은 GERD가 아니라 울트라라는 콩밭에 가 있네요. 

결과적으로, 내과 교수들의 강의가 아니라 울트라를 강의할 울트라맨 하나에 ‘억’ 소리 나게 돈이 들어가는 행사의 승패가 갈리게 생겼으니 이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이겠는가?


하지만 평소에 영상의학과 의사와는 일면식도 없으니 어느 누가 이 분야의 대가인지 알 길도 없고 하여 강의를 들을 내과 선생들의 추천에 따라 대구까지 내려가 그 분야의 유명 내과 선생을 만났는데 본인은 안 된다 하고, 대신 영상의학과 의사 한 사람을 추천해 주어 급한 김에 찾아오긴 했는데, 아~ 이거이 현직 교수도 아닌 것이, 듣도 보도 못한 지방의 조그만 내과 전문병원에 근무하는 머리 허연 '연금수급 · 경로우대 · 오전알바 · 은퇴노털 · 장애인 의사'가 아닌가! 


(당시 나는 2018년 8월 31일부로 대학에서 정년퇴임 한 후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이 병원의 영상의학과 과장이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신임과장이 부임하기까지 비는 3개월 반의 공백을 메워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고 심심풀이 삼아 오전 근무 알바로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들이 몇 초 사이에 내 머릿속에서 휘리릭 돌아가고 나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와 동시에 '내 강의 하나에 이 행사의 승패가 달렸다?'라는 묵직한 짐의 무게가 기분 좋게 눌러왔다.


원외(院外) 초음파 초청 강연 제안이 얼마 만이던가?

1년 10개월 만이다.

초야에 묻혀있던 장수에게 오랜만에 칼이 들려졌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잠잠했던 프로 근성의 피가 슬슬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꾸나."



표제 사진 출처 : https://matreeservice.com/2018/11/4-benefits-of-burning-fire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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