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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Jan 21. 2024

강28 무대의 막은 올라가고

실전에피소드 04

첫 연제가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드디어 오버나이트 심포지엄(Overnight Symposium)의 피날레를 장식할 나의 시간이 온 것이다.


나는 심포지엄 시작 전 리허설 한대로 등단한 후, 상의 안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연단 위에 올려놓고 녹음 버턴을 눌렀다.

좌장의 연자 소개가 끝나자 나는 아무 말 없이 좌중을 한 번 휘 둘러보고는 다음과 같이 운을 뗐다.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지난 35년간 대학에서 초음파라는 한 우물만 파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8월 31일부로 첫 직장에서 정년퇴임 한 후 제2의 인생은 의사로서 보다는 작가로서, 그리고 인문학 강사로서 살아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미 초음파란 무대의 커튼 뒤로 사라진 저를 다시 불러내어 Special Lecture란 특설무대까지 마련해 세워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중략-

 

인사말이 끝나고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첫 슬라이드를 비췄다.

거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형사 콜롬보의 모습과 함께, 그가 사건 현장을 둘러본 후 양쪽 눈썹의 높낮이가 다른 특유의 꺼벙한 표정으로 제일 먼저 꺼내는 말,

"I just have a question. 딱 한 가지만 물어보겠는데요."라는 대사가 적혀있었다. 



이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내 강의의 첫마디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상복부 초음파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들라면 여러분은 무어라 답하시겠습니까?"      

그리고는 약간 뜸을 들이며 좌우로 청중을 훑어보았다.


이 짧은 침묵의 시간 속에는 '앞으로 진행될 내 강의는 그냥 맹목적으로 듣지 말고 생각하며 들으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이윽고 내가 말했다.    

"초음파 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변을 놓치지 않고 찾아내는 것이지요."     


그렇다.

현대 영상의학검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초음파, CT, M.R.I 중 제일 먼저 시행하는 검사는 초음파다. 전선으로 치면 최전방에 배치된 척후병 같은 부대다.


만일 여기서 조그마한 초기 암을 놓치기라도 하면 다음 검사까지 최소한 6개월에서 1년은 걸리고, 그 사이 간암이나 췌장암 같은 악성 중 악성인 암은 손쓸 수 없을 만큼 훌쩍 자라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첫 검사에서는 병변을 잡아내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테크닉을 익히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얼까요?"


"그것은 바로 Diffuse hepatopathy 환자의 추적검사에서 이전 검사와의 차이점을 잘 감별해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간 질환이 의심되어 초음파 검사를 받는 환자의 대부분은 지방간, 간염, 간경화 같이 간 전체를 침범하는 '미만성 간질환, Diffuse hepatopathy'이고 이들은 정기적인 추적검사를 통해 그 사이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있으면 어느 정도인지를 잘 감별해야 하는데 나처럼 초음파를 주업으로 하지 않는 의사들에게는 참으로 쉽지 않은 작업이다.


왜 그럴까?

그 가장 큰 원인은 시술자마다 영상에 접근하는 방식이 제각각이란 점에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술자가 영상의 크기(scale of the images), 찍는 순서, 찍는 각도, 찍는 매수를 일정한 규격에 맞추어 시행하는 '초음파 영상의 표준화 작업(Standardization of US images)'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몸에 배어있지 않으면 한 의사가 같은 환자의 추적검사를 하면서도 그때마다 찍는 비우(view)나 화면의 밝기가 달라, 지가 찍어놓고도 지가 헷갈리는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럼 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다 잡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촘촘하게 그물을 짠 초음파 영상의 표준화 작업입니다."     


이 표준화 작업은 필자가 1990년 서울대학 병원 영상의학과 초청 강연 때부터 그 중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한 후, 2018년에 이르러서야 보건복지부가 의료보험 대상 초음파 환자의 급여기준으로 제정하였다. 나의 주장이 28년 만에 결실을 본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도 외부병원에서 찍어오는 사진들을 보면 도무지 내 성에 안 찬다.

아직도 많은 시술자가 이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때부터 나는 내가 제시하는 세밀한 표준화 영상이 왜 중요한지,

이들 영상 하나하나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이렇게 하면 왜 병변을 놓칠 확률이 줄어드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초음파로 잡기 힘든 부위에 있는 혹을 잘 잡아내는 방법과 장내 공기로 가려진 췌장을 잘 보는 방법 등, 35년 동안 연마해 온 나의 노하우 보따리를 아낌없이 풀어놓았다.          


대부분의 초음파 강의란 것이 질환 별 초음파 소견 및 다른 질환과의 감별점에 관한 것인데 반해, 내 강의의 초점은 언제나 초음파 술기의 기본과 검사 과정에서 부닥치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가는 방법에 맞추어져 있었다.     


비유로 말하자면, 다른 연자들이 텍스트북이라는 냉장고에서 꺼낸 식재료로 맛있는 생선 요리를 만들어 입에 넣어주었다면 나는 물고기 잡는 법을 밥상 위에 올려놓고 이것으로 큰 놈을 잡든 작은놈을 잡든, 지져 먹든 삶아 먹든 니 알아서 해라는 식이다.

   



강의를 오래 하다 보면 나름대로 감이 온다.

내가 하는 말이 청중에게 좍좍 빨려 들어가는지 아니면 튕겨 나오는지.

이날은 10분도 채 안 되어 바로 감이 왔다.


나의 강의는 청중석을 향해 물 흐르듯 흘러내렸고, 100갈래로 갈라진 물줄기는 스펀지에 빨려 들어가듯  청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흠뻑 스며 들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의는 열기를 더해갔고 연자와 청중은 혼연일체가 되었다.     

 

"땡!" 하는 종소리가 들렸다.

내가 부탁한 대로  좌장이 종료 시각 5분을 남기고 종을 친 것이다.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 할 시간.

마지막 슬라이드를 비춘 후 마지막 멘트를 날렸다.


"여러분, 이제 제 강의는 끝났습니다.

오늘 이 강의가 초음파 강의로는 제 인생에  마지막 강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게 한 가지 원이 있다면 오늘 제가 한 강의로 여러분의 머릿속에 초음파에 관한 몇 가지 지식을 남기기보다는 앞으로 복부 초음파를 할 때 어떤 마인드로 임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느낌 하나를 여러분의 가슴속에 남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의 이 Last lecture가 지금까지 해 온 그 어떤  강의보다도 더 의미 있는 lecture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해안가에 밀려온 파도가 물러가면서 남긴 포말처럼 아쉬움의 잔 박수가 길게 꼬리를 끌었다.


내 생애 가장 완벽한 시스템을 갖춘, 가장 우아한 강연장에서, 가장 몰입도 높은 청중과 한바탕 어우러진 가슴 뿌듯한 시간이었다.




                                                                                                                                          Will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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