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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Oct 06. 2024

소낙비, 다락방, 그리고 놀부

소낙비와 다락방


지난 학창 시절을 되돌아볼 때 빠지지 않고 떠오르는 추억 중 하나는 고1 때 겪은 월남 파병과 관련한 일이다.


베트남 전쟁은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일명 베트콩)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정부와 이를 지원하는 미국과 벌인 전쟁으로서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끝난 전쟁이다.     


이 전쟁에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여러 가지 이유와 전략적 목적으로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청룡·백마부대 등 아직도 그 이름이 귀에 생생한 전투부대를 15년여에 걸쳐 30만 명 이상 파병함으로써 한국은 미국 다음가는 참전국이 되었다.      


1968년 여름. 베트남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우리는 부산항에서 월남으로 떠나는 국군장병들을 환송하기 위해 부두로 갔다. 

당시 부산 시내 각 학교에서 차출되어 온 학생들은 부둣가에 죽 늘어서서 한 배 가득 군인들을 싣고 전쟁터로 떠나는 군 수송선을 향해 태극기를 흔들며 격려의 함성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사지(死地)로 떠나면서도 우리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대는 군인들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번영은 기성세대들이 이런 핏값을 치러 가며 하나하나 쌓아 올린 눈물겨운 대가란 사실을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처럼....     


환송식을 마치고 부두를 나와 다들 흩어지는데 갑자기 억수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자 옆에 있던 기동이가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해서 나와 동윤이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가 버스를 타고 서면에서 내려 그의 집이 있는 범천동으로 걸어갔다.     


다들 나 때문에 빨리 뛰지도 못하고 세찬 비를 쫄딱 맞으면서 한 15분 이상 걸었던 것 같다.

그날 비를 얼마나 세게 맞았던지 반소매 하복 밖으로 드러난 나의 팔과 손이 벌겋게 부어오를 정도였다.


그의 집은 철도공작창 근처,
영화 『친구』에서 주인공들이 도망을 가면서 건너던 철길 위 구름다리 아래에 있는 골목에 있었는데 

그렇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길은 난생처음이었다.     


집에 들어가니 정말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바깥채가 코 닿을 듯 나뉘어 있고, 

안채에는 부모님이 살고 바깥채에는 세 든 사람들이 산다고 했다.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세 든 사람들 모두 일하러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옷을 벗어 빨래 짜듯 물을 짜서는 다리미로 옷을 다려 말렸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때라 배는 고파 죽겠는데 집에는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각자 집에 갈 차비만 남기고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라면 몇 봉지를 사서 끓여 먹었는데 

얼마나 맛이 있던지! 그날의 그 라면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그의 방으로 갔다.

그의 방은 안채 뒤쪽 지붕 아래 한구석에 만들어진 조그만 다락방으로서 

벽에 붙은 짧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그 방은 허리를 굽혀야 다닐 수 있는 낮고 좁은 방으로서 창이 두 개 나 있었는데 

그중 하나로는 뒷집 마당과 안채 마루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순간 나는 '저 집 여자들, 여름에 웃통 벗고 등물은 우째 치겠노?' 싶어 걱정되었다.


아무튼, 그날 그를 따라가서 본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했고, 신기했고, 정답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다락방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내게 꿈 하나를 심어주었다.    


내가 늘그막에 내 집을 짓는 날이 온다면 2층으로 집을 지어 

‘ㅅ’ 자 형 지붕 아래 창이 달린 아담한 다락방을 하나 만들어 그 방을 내 방으로 삼고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하늘과 구름을 감상하며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그런 꿈 말이다.     


인간 놀부


내 친구 기동이는 이기동이란 이름보다는 ‘놀부’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 별명은 기동이만큼이나 키가 작았던 '손동기'라는 독일어 선생님이 지어주셨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잘 지었는지!  


그 놀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흥부전에 나오는 연놀부가 바로 이렇게 생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설 속 놀부의 성이 ‘연’ 씨라는 사실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내 친구 놀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자신이 놀부로 불리다 보니 그의 뿌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었나 보다.)    


그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행동으로 개구쟁이 짓을 도맡아 했으며 사진을 찍을 땐 항상 모자를 삐딱하니 썼다.


그는 못된 놀부가 아니라 착하고 익살스러운 놀부였다.     

그의 집을 다녀온 후 친구에 대한 나의 생각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


그전까지는 항상 밝은 얼굴과 익살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그가 그저 재미있고 편해서 좋았는데
그의 사는 형편을 보고 난 후에는 일종의 존경심 같은 게 더해졌다.     


그와 나는 성장 배경과 가정환경이 너무나 달랐다.

나는 어려서부터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란 반면, 그는 참으로 어려운 환경 아래서 잡초처럼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빗나가지 않고 올곧게 자라, 그렇게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가 이전과 달라 보인 것이다.      


    도토리 키재기    

 

# 2020-08-18

“야, 이 교장, 잘 있나? 뭐 하나 물어보자. 우리 고1 때 내가 몇 번째 줄에 앉았노?”

“니? 맨 앞줄에 앉았지.”     


“내가 둘째 줄에 안 앉았나?”

“내가 둘째 줄이고 니는 내 바로 앞에 앉았다 아이가!”     


"아니, 그럼 내가 니보다 키가 작았단 말이가? "

"그렇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 이 사람아, 내가 니보다 작았겠나? "

"어허이, 이 양반이 사람 너무 낮춰보는 경향이 있네. 이래 봬도 내가 1학년 때는 11번이었다, 11번. 

 한 줄이 옆으로 8명이었으니까 어디 보자~~, 니는 3번이네.”


헐!?


당시 그가 나보다 키가 컸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퇴근해 집에 와서 졸업앨범을 찾아보니
서로 반은 달랐지만 3학년 때 나는 3번, 그는 2번이었다. 

그 친구는 아마 1학년 때 성장판이 닫힌 모양이다.     

아무튼, 지금은 분명히 내가 그보다 크다.


이런 걸 두고 도토리 키재기라 하던가?

아무래도 내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약간 있는 모양이다 ㅎ.  


※퀴즈

                    아래 사진은 고등학교 때 저와 제일 친했던 친구들입니다. 이 중 놀부는 몇 번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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