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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Jun 14. 2023

인IV 03 그대 있음에...

촌색시

사회봉사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오토매틱으로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

그는 별것 아닌 일로 나라로부터 상을 받은 내 손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이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끝냈다가는 내 꿈자리가 사나워질 것 같아 지금부터 그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고향인 경남 언양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민족의 정기가 서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산의 명문 동래고로 유학을 와 나와 한 반이 되었다.

  
그의 하숙집은 포교당(현 법륜사) 앞에 있는 우리 집에서 인성문 쪽(현 복천박물관 쪽)으로 100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에 있는 데다 학교에 가려면 우리 집 앞을 지나가야 했기에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워낙 맑은 성품인 데다 그에 걸맞은 해맑은 웃음과 수줍어하는 모습이 마치 순박한 시골 아가씨 같아 나는 일찌감치 그에게 ‘촌색시’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등교 시에는 항상 우리 집에 들러 지체장애인인 내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고, 하교 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여 그와 나는 고교 삼 년 동안 서로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는데 우리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다음의 일화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고교 2학년 때인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문제로 학생 데모가 한창이던 시절, 내가 데모 주동자로 찍혀 훈육주임인 담임 선생님께 불려 가 취조를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어느 날 밤, 그날따라 이상할 정도로 많은 친구들이 우리 집을 들락거렸는데, 마침 하숙촌 주변을 감시하던 동래서 정보과 형사 한 명이  장면을 보고 나를 데모 모의 주동 용의자로 학교에 통보하여 그리 된 것이다.


몇 년 전, 회고록을 쓰면서 이 대목에 이르자 그날 밤 그도 함께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여 서울 사는 친구에게 전화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군더더기 없이 딱 한마디로 명쾌하게 상황을 종결시켜 주었다.          


", 그 당시에 한상석이 가는 곳에 이 이동윤이가 없은 적 있었나?!"          


그랬다.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빛과 그림자’

그와 나는 고교 3년 동안 줄곧 같은 반을 한 것도 모자라 대학까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들어가 평생을 같은 의사의 길을 가고 있으니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니다.       

   

군인 이동윤

그는 대학 졸업 후 군의관으로 갔다가 군에서 트레이닝받고 외과 전문의가 되어 군에 말뚝을 박았다.

하고 많은 의사의 길 중에 하필이면 군인이라니?!

촌색시가 군인으로 변신한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그는 군에서 승승장구했다.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군의·치의 보직담당 장교
이 자리는 군에 들어온 군의관과 치의관들의 자대 배치를 관장하는 부서의 장으로서 사회 고위층들의 청탁이 끊이지 않는 자리 인지라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야말로 노른자위 보직이었다.


하지만 잘못된 일이라 생각되면 나 같은 절친도 가차 없이 고발(?)하는 그에게 그런 것이 통할 리 없었다. 

(보조기 11화 참고, https://brunch.co.kr/@@dCCW/18) 

    

그는 고심 끝에 신참 군의 장교 자대 배치를 사람이 아닌 컴퓨터 추첨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전산화 시스템을 개발 ·도입하여 사람의 개입을 근원적으로 차단시킴으로써 누구의 청탁이나 압력도 통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만족도 30%만 되어도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듣던 인사 배치가 이 시스템 도입 후 75% 이상 올라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에 자극받은 다른 부서에서도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문제가 많은 줄 알면서도 그동안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십 년 된 관행을 하루아침에 뜯어고친 개혁과 배짱의 사나이. 그것은 내가 몰랐던 촌색시의 또 다른 면모였다.


이러한 그의 출중한 능력과 청렴성과 강직함을 인정받은 그는 군의관으로서의 요직을 두루 거쳐 나중에는

청와대 의무대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이 직책은 대통령의 신체에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5분 내로 달려가 응급처치를 하고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 자리로서 대통령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야 했다.


경호원들이야 교대로 경호를 서지만 의무대장은 대신해 줄 사람도 없는 직책인지라 그는 밤낮없이 '삐삐'를 켜 놓고 '5분 대기조' 노릇을 해야 했는데 이런 고된 일을 그는 물경 5년 3개월이나 감당했다.


대통령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으면 “니는 내하고 끝까지 같이 가재이.” 하며 눈치도 없이 임기 끝나는 날까지 잡아 두었을까?   

     

그 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청와대 내에 근무하던 군인들은 모조리 짐을 싸야 했는데, 그는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하며 ‘국군수도병원 병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병원은 문세광이란 저격범에 의해 육영수 여사를 잃은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도 선진국들처럼 국가 요인의 생명이 경각에 달리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전담할 최고 수준의 군 병원이 하나 있어야겠다 하여 세운 병원인데, 이를 세운 박 대통령이 그곳에서 돌아가셨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로 이 병원은 중국의 301 병원처럼 우리나라 최고위급 인사들의 진료를 담당하게 되었고 그런 병원의 원장인 내 친구가 매일 상대하는 사람들은 차관급 이상의 고위직이었다.     


그가 병원장으로 부임한 지 1년쯤 되어 나는 학회 참석차 서울에 올라갔다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찻집에서 그를 기다리며 그동안 이 친구가 어떻게 변했을지 온갖 그림을 다 그려봤다.


- 군에서 잔뼈가 굵은 데다 6~7년 동안은 대통령을 위시하여 대한민국 최고위층만 상대해 온 사람이다.

얼마나 근엄한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그리고 목에는 또 얼마나 힘이 들어가 있을까? -         


약속 시각이 다 되어 창밖을 내다보니 시커먼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찻집 앞에 대고 곧이어 군복 차림의 운전기사가 잽싸게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한 사람이 내리는데 바로 내 친구였다.

      

그는 다방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보는 순간, 다른 손님들 귀에 다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야, 상석이 아이가!” 하며 다가오는데 그 얼굴표정, 제스처, 목소리, 말투, 그 모든 것이 고교 시절 3년 동안 보았던 바로 그 촌색시 그대로였다.

     

군복 입은 것 외에는 어느 것 하나 변한 데가 없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혼란스러워졌다.     

‘이 사람 이거, 그런 병원 병원장 맞나? 저래 권위가 없어 보여 가지고 어디 부하들 통솔이나 제대로 하겠나?'     

하지만, 그런 그의 변함없는 모습이 너무나 좋았고 그날 나는 그 관용차를 타고 남산 어딘 가에 있는, 입구 초소에서 위병이 검문하는 그런 그의 관사에 가서 그간 못다 한 옛이야기로 밤새도록 흠뻑 취했다.

      

그런 지 몇 년 되지 않아 장성 진급을 눈앞에 두고 그는 돌연 군 생활을 접고 동네 의원 원장으로 변신하였다.

군의관이 별을 달았다면 두고두고 전설로 남을 것이고 연금도 훨씬 많이 받을 텐데, 그 좋은 별을 눈앞에 두고 그만두다니??!


나는 도무자 이해가 가지 않아 그 이유를 추궁하듯 물었지만 입은 또 얼마나 무거운지, 끝내 제대로 된 답변은 듣지 못하고 선문답 같은 알쏭달쏭한 소리나 몇 마디 듣고 말아야 했다.


진정한 박애주의 의사

1997년 말, 대한민국은 IMF라는 비극적인 사태를 맞으면서 각 직장에서는 감원의 강풍이 몰아쳤고 그중 퇴직 일 순위는 같은 직장 내 맞벌이 부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젊은 부부가 둘이 벌어서 아이 키우며 생활해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외벌이로 전락하니 살림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데, 그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자식마저 암에 걸리면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식 치료비로 살림이 거덜 난 집, 아이 치료를 포기한 집, 극빈자 수당이라도 받아 치료비에 보태기 위해 울며 이혼한 집 등, 내가 미처 몰랐던 IMF의 또 다른 비극을 내 친구는 목격하게 되면서 의사로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단다.     


그런 그들을 도울 방법을 고심하던 중, 자신이 매일 하는 달리기를 통해 소액 기부 캠페인을 벌여 기부금을 모아 도와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주변의 달리기 동호인들과 함께 힘을 모아 소아암환우돕기 서울시민마라톤대회 라는 것을 만들었다.


2002년에 발족한 이 단체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일 년에 하루는 이런 어려운 처지에 있는 환우들을 돕는 달리기를 하자!'라는 기치를 내 걸고 대회 참가자들의 자발적 기부성 참가비로 생긴 수익금을 형편이 어려운 소아암 환우 치료비로 전액 기부했다.    

 

그렇게 시작된 ‘기부 마라톤 대회’는 그간 한 해도 그러지 않고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 18회를 이어오면서 총 6억 3000여만 원을 모아 삼성서울병원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소아암 환우들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한다. (2022년 4월 26일 자 문화일보 [자랑합니다] 편에 난 기사 참고)    

 

그의 지론은 이랬다.

소아암은 70% 이상 완치가 가능한데 그걸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하지만 치료비 때문에 가정이 깨지면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어떡하든 부모와 아이가 모두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들이 기부 대열에 참여하게 되면 이 사회에 기부의 선순환(善循環)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참으로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었다.

2년 전,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동안 몇 명이나 도움을 주었냐?"

"모르겠다."     


"아니, 니가 모르면 누가 아노?"

"처음부터, 환자 수 세지 말고 기록도 하지 말라 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고?”

"그런 걸 기록하고 기억하다 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이상하게 써먹을 것 같아서."     


이 친구가 사람을 여러 번 놀래킨다.

참 대단하다. 존경스럽다.

그야말로 진정한 기부자요 참다운 의사다.


                    

팬데믹이 엔데믹으로 바뀐 후 마라톤 대회는 또다시 재개되었다.

그는 오늘도 달린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병원을 놓아두고, 10km를 달려서 출근하고 10km를 달리며 퇴근한다.

지금껏 그래 온 것처럼, 환우 돕기 마라톤 완주를 위하여...


그대 있음에

                          "친구여, 그대 있음에 세상이 참 훈훈해 오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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