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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y 10. 2024

인IV15 나를 일으켜 세운 선생님 사랑


평생 잊지 못할 선생님 한 분만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박양태’ 선생님이라 답할 것이다.    

 

# 때는 1965년

나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난생처음 입시라는 걸 치렀는데 거기서 그만 보기 좋게 낙방하여  2차인 한 신생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생의 첫 관문에서부터 좌절을 맛보게 된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때 느꼈을 나의 감정은 입학기념으로 찍은 명함판 얼굴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금방 울 것 같은 우울한 표정과 우수(憂愁)에 젖은 눈망울이 언제 봐도 애처롭다.     

입학하고 보니 참으로 기도 안 찼다.

말이 신축 교사지 본관 건물만 제대로 된 콘크리트 건물이었고 내가 공부할 1학년 교실은 철거민 판자촌에서나 볼 수 있는, 말 그대로 나무판대기로 이어놓은 가교사(假校舍)로서 비 오는 날이면 천정에서는 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고 교실 앞마당은 개펄처럼 질퍽거렸다.

졸업 앨범 사진


하지만 이 정도는 양반이다. 학교가 들어선 부지가 얼마 후에 이전해 갈 육군형무소 땅이라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철조망을 중심으로 이쪽은 학교, 저쪽은 형무소였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면 수감된 죄수 군인들도 일정한 시간에 나와 일렬로 서서 호각소리에 따라 운동장을 돌며 구보를 하기도 하고 가벼운 운동으로 몸을 풀기도 했는데 양쪽 코너에는 총을 든 간수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이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갓 입학한 열서너 살 되는 아이들로서는 '철조망'과 '죄수', ‘군인‘과 '총'이 주는 살벌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 수밖에.

    

이럴 때 한 줄기 따뜻한 등불이 되어준 분이 바로 박 양태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1학년 때 담임이자 3학년 때 담임으로서 인생의 첫 관문인 입시에서 낙방하여 실망하고 열악한 학교환경으로 실의(失意)에 빠진 나를  따뜻이 보듬어준 분이셨다.

소풍 갔을 때 필자가 찍은 사진


선생님은 키가 컸고, 부드럽고 자상했으며 반에서 하나밖에 없는 장애인인 나를 지극한 사랑으로 대해주셨다.

그리고 그 사랑 덕분에 나는 일생에 도움 안 되는 '실의'라는 감정의 늪에서 하루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랑이란 놈은 참 이상한 존재다.

백 마디 말보다 말 없는 느낌과 눈빛으로 자신의 정체를 더 잘 드러낸다.

당시 선생님이 나에게 어떤 말로 위로하고 격려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대신, 그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감정과 그 자애로운 눈빛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쉰다.



졸업 후 선생님을 다시 뵌 건 레지던트 1년 차 때였다.

내가 대학병원 의사가 되어있다는 소문을 듣고 병원문제로 부탁할 일이 있어 찾아오신 것이다.

나는 힘닿는 대로 일을 봐 드린 후. 저녁에는 식사 대접을 하고 헤어질 때는 차비하시라며 봉투 하나를 챙겨드렸다.


당시 레지던트 1년 차 봉급이 21만 원. 그 돈으로는 아내와 첫딸 먹여 살리는 것도 힘든 금액이라 정말 얼마 안 되는 돈밖에 못 넣어 드린 것이 아직도 못내 아쉽다.

하지만 그렇게로나마 스승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지!      


이게 다 의사 된 덕분 아니겠나.

내가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사가 아니었으면 졸업 후 20년도 더 지난 제자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어떻게 알겠으며, 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제자 찾아와 부탁할 일이 뭐 있겠는가?


나는 전문의가 된 후 바로 대학 선생의 길로 들어서 35년을 걸어왔다.

그동안 내가 제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남다른 정성과 사랑을 쏟아부은 게 있다면 그 씨앗은 바로 선생님께서 심어놓은 것이리라.     


지금쯤이면 아마도 돌아가셨겠지.
선생님과 관련된 잊을 수 없는 일화 하나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선생님을 회상해 본다.     




# Episode     

요즈음 교사나 공무원은 어떤 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 중 하나지만 그 당시 참 못 먹고 못살던 시절, 선생님들 봉급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실력 있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학교 밖에서 과외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런 사정은 학교에서도 알면서 모른 채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그때는 학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할 만큼 큰 규모의 과외 기관은 거의 보지 못했고, 대개는 전문 강사나 선생님 한두 분이 모여 방 한두 칸 세내어 간판 없이 가르치는 ‘공부방’ 수준이었다.

선생님은 젊은 영어 강사가 운영하는 공부방에서 수학을 가르쳤고 우리 반 학생 대여섯 명이 그 공부방에 다녔다.    

  

전라도분인 선생님에게는 전라도 특유의 말버릇이 있었다.

칠판에 수학 공식을 써 놓고 설명을 할 때면 꼭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놈과 요놈을 더하면 조놈이 되지요?”  

   

그러던 어느 날,

 홍 머시기라 하는 다소 별난 장난꾸러기 친구가 수업 도중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말했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설명할 때 자꾸만 요놈 조놈 하시는데, 요놈 조놈 대신 요년 조년이라 하믄 안 되겠습니까?”    

 

그날 우리는 다들 배를 잡고 뒤로 뒤집어질 만큼 웃어댔다.     

선생님도 그 친구도 또다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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