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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 드립니다(12).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다시 유럽으로 왔습니다. 이번 글의 주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신항로 개척과 대서양 체제의 성립을 다룰 예정입니다. 연구자들마다 이견이 조금 있습니다만, 오늘 다룰 용어와 관련된 변화가 나타난 시기를 초기 근대(Early Modern)라고 부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모습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뜻이죠. 사실 '근대'라는 용어를 무엇이라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개인중시, 종교와 세속의 분리, 평등, 자본주의, 이성적 사고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다룰 두 사건은 그중에서도 개인중시와 종교와 세속의 분리가 시작된 시기라 의미가 있습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

르네상스는 '다시'라는 접두어 're'와 '탄생'이라는 'naissance'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시간상으로 기원후 1300년대부터 1500년대까지의 유럽의 변화상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한국어로는 문예부흥이라고 번역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지만, 원어가 가지는 복잡한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하여 최근에는 다시 르네상스라고 표현합니다. 르네상스가 재탄생했다는 의미를 가진다면, 무엇이 재탄생했을까요? 여기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인간중심(휴머니즘) 또는 개인을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왜 개인이 재탄생한 것일까요? 아리송한 표현 때문에 더 어려워집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차근차근 당시 유럽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기원후 1270년경을 즈음하여 십자군 원정은 종료됩니다. 성전(예루살렘)을 탈환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무역로가 개척되었습니다. 바로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무역로가 개통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는 엄청난 이득을 누립니다. 여기에 더해 동쪽에서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주던 동로마 제국도 쇠퇴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슬람을 피해 같은 기독교 국가로 피난온 동로마인들은 이탈리아에 정착합니다. 그러면서 예전 로마가 가지고 있던 문화유산들에 대해 알려주면서 과거 이탈리아가 로마제국의 중심지였음을 일깨워 줍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십자군 원정에 실패하면서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1500년경 이탈리아 상황을 나타낸 지도, 보라색 위의 주황색 도시 국가들이 르네상스를 주도하였다(출처: https://maps-italy.com)


경제적 성장과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증가는 이탈리아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모든 문화가 기독교와 관련된 세계관에서 그리스 로마 문화의 재발견은 호기심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이교도의 유산이라 하여 금기시되어 있던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토론과 배움은 지식인들과 상류층 사이에 유행처럼 퍼져나갑니다. 여기에 더해 경제적 부를 획득한 상인들과 정치가들이 자신의 위상이나 교양, 업적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작품들을 수집하면서 그 흐름은 더욱 가속화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과 이성과 신앙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욕구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들, 인간의 감정이 제어의 대상이 아니라 표현의 대상이라는 생각들이 나타납니다. 기존 중세에서 요구했던 순종, 복종, 절제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학작품들도 이런 인간의 욕구나 감정을 자연스럽게 다루기 시작합니다.


미술작품은 이런 변화가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분야였습니다. 보티첼리,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다빈치와 같은 천재 예술가들이 등장하여 각자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종교적 이유로 금기하였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장면들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육체 묘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성당과 주요 건축물들에 이런 작품이 그려지거나 전시되면서 확실히 이탈리아의 모습은 중세 시대의 모습과는 다른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엄격한 기독교 세계관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꽃을 피운 르네상스는 북유럽(독일, 프랑스, 영국 등)으로 퍼져나갑니다. 주로 이탈리아에 유학을 다녀온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이런 흐름을 전파합니다. 그러면서 차이점도 발생합니다. 북유럽에는 상대적으로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덜했고 유산도 그만큼 적었기에 이 지역의 관심은 최초의 기독교 모습에게로 향합니다. 특히나 당시 교회와 성직자의 부패 문제가 이런 문화 흐름과 연결되면서 지식인들은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성직자와 교황이 아닌, 성경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화 흐름이 새롭게 탄생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학자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구분합니다. 교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다음에 이어질 기독교 세계의 분열의 원인이 됩니다.


종교개혁(The Reformation)

로마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단단히 결속되었던 기독교 세계관은 1517년 한 성직자에 의해 깨지기 시작합니다. 루터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성직자는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 판매하고 있던 면벌부를 비판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받을 벌을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루터는 이런 생각을 글로 적어 비판합니다. 이런 관행은 항상 있었던 것이지만, 루터의 글은 당시 발달한 인쇄술로 인하여 엄청나게 주목받습니다. 독일 각지로 퍼져나간 것이죠. 지금으로 치면, 한 순간에 인플루언서나 SNS 스타가 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당연히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했고 루터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성경 중심의 교회를 새롭게 조직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루터파 교회의 탄생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칼뱅이라는 성직자가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합니다. 루터와 동일하게 칼뱅도 성경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교회체계를 바꿉니다. 여기서 장로교 또는 장로파가 등장하게 됩니다. 교회의 운영진인 장로를 중심으로 목회자가 함께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체계는 여기서 유래하게 됩니다(오늘날 한국 교회 다수가 칼뱅파를 따르고 있습니다). 칼뱅은 또한 예정설을 주장하여 이미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으니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라는 교리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직업인들에게 직업정신을 갖고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그의 주장은 상인, 금융가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습니다. 이를 자본주의 발전과 연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루터와 칼뱅 파는 북유럽에서 엄청난 호응을 받습니다. 독일과 네덜란드 프랑스에서 각광받죠. 이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종교를 이단으로 여겨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른바 종교전쟁입니다. 1517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은 종교 주도권을 가지고 피로 얼룩진 살육전을 벌입니다. 구교(가톨릭) 진영과 신교(루터, 칼뱅) 진영이 서로를 적대시하며 학살극을 벌입니다. 특히 독일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어 독일인구의 절반을 감소시키고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어 버립니다.


1500년경 유럽의 종교분포도, 보라색이 루터파, 회색이 칼뱅파, 주황색이 영국국교회, 황토색이 가톨릭이다

잔혹한 종교전쟁의 결과, 유럽은 더 이상 종교를 강요하지 않기로 합니다. 바로 최초의 국제조약이라 불리는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신앙은 개인에게 맡긴다'라고 결정짓습니다. 이로써 종교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후에도 종교전쟁은 종종 일어나긴 했지만, 그전과 같이 치열한 형태로 전개되진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였던 기독교 세계는 로마 가톨릭과 루터, 칼뱅(영국의 경우 영국국교회)으로 나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더 이상 정치 문제와 연결 짓기를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와 세속 분리의 움직임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신항로 개척과 대서양 체제의 성립을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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