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 끄적-17. 주제파악
내 발목을 잡는 말들
"주제파악 좀 하면서 살아라"
여태껏 살면서 인생의 갈림길에서 항상 듣던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상자 조립대회가 있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 로봇도 만들고 자동차,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 멋있어 보여서 나도 나가고 싶다고 했었다. 뭔지도 모르고 문방구에 같이 갔던 어머니는 제일 싼 과학상자가 만 오천 원이라는 말에 '우리 주제에 무슨 만오천 원짜리 장난감이냐'라고 혼내시며 집으로 돌아왔다. 운동부 같이 뭔가 사야 하는 특별활동도 '우리 주제에'라는 말에 꿈도 꾸지 못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시기에도 '우리 주제에 대학 갈 것도 아닌데 인문계를 왜 가려고 그러냐'라는 말에 실업계로 방향을 틀었다가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인문계 학교를 가고 나름 열심히 공부해서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로 진학할 수 있었다. 비록 나중에 다른 길로 새기는 했지만 '우리 주제에'라는 말은 항상 내 발목을 잡는 족쇄였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조명 담당으로 공연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성인극은 프로 조명팀이 와서 조명을 만들어 주고 그 공식을 극본에 맞춰 플레이만 하면 됐지만 낮에 하는 아동극은 연출님과 함께 만들어 공연을 했다. 2년 반동안 했던 여러 아동극 연출님들께 칭찬도 받았고 만들어진 틀이라고는 하지만 중간중간 내가 만들어 추가한 성인극 조명으로 공연하며 쌓이는 경험을 토대로 프로 조명팀에 들어가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나를 좌절시킨 것은 목표로 했던 프로 조명팀의 팀장 한마디 었다. '전공도 아니고 나이도 있는데 뭘 배울 수나 있겠냐? 서른 살 다 됐으면 주제파악 할 줄도 알아야지"라는 말에 2년 반동안 해오며 키워온 자존감은 한 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렇게 무너지고 나니 더 이상 공연을 이어나갈 힘이 없어 도망치듯이 그만두고 나와버렸다.
전 직장의 물류 센터에서 일을 하면서도 본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기에는 불편한 점들이 많았다. 통합 물류센터로 운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기에 시스템도 불안하고 오류가 많아서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개선 보고자료를 만들었다. 물류 팀장에게 제출했을 때 자료를 보지도 않고 한 말이 '네가 뭔데 이런 걸 만드냐?'와 '이런거 만들 시간에 주제파악 좀 하고 일이나 해라'였다. 도대체 뭐가 내 주제일까? 밤 12시까지 오류에 시달리면서 일하는 게 내 주제일까?라는 생각에 센터장에게 다이렉트로 보고서를 올렸고 본사에서 시스템 개선이 이루어졌다. 개선은 이루어졌지만 결제라인을 뛰어넘어버린 주제파악 못하는 나는 미운털이 박혀버렸다. 그래도 좋았다. 처음으로.
우리 주제에 그런 건 안돼
니 주제에 뭘 할 수 있겠냐?
주제파악 좀 하고 일이나 해!
적어도 이런 말은 안 하는 어른이 되리라 다짐한다. 가족이든 동료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