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올딱 한잔 빨아삐리뽀?
처음 소주를 먹었던 때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이었다.
여느 고등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수학여행 첫날 저녁 자유시간에 소위 일진이었던 친구들이 몰래 소주를 숨겨와서 자기들끼리 먹고 있다가 찐따처럼 있던 범생이들에게 먹어보라고 한 잔씩 돌려주었다. 범생이들이 술 먹는 모습이 재미가 있었는지 아니면 공범을 만드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탠물컵에 조금씩 따라 준 소주 한잔을 먹고 기절했던 기억이다. 수능이 끝났는데도 기말고사까지 내신에 들어간다고 해야 했던 야간자율학습을 몰래 도망쳐 간 단골 야채곱창 집 사장님이 주셨던 소주 한 병을 네 명이서 나눠먹고 취해 집에 갔다가 아버지께 검도하는 동생의 목검으로 맞기도 했다. 수능도 끝났겠다 조금 있으면 성인인데 술 좀 먹을 수 있지요라고 대들다가 더 혼쭐이 나곤 했다.
대학교 입학 후부터 본격적인 음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1학년 때 선배들이 사주는 술은 공짜라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소주를 마시다 토하고 마시다 토하고를 반복하면서 먹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술이 늘어나니까 쭉쭉 먹으라고 술잔을 채워주는 선배들 덕분(?)에 내 주량은 두 잔에서 반 병, 반 병에서 한병, 한 병에서 두병으로 점점 늘어갔다. 학교에서 집이 멀다 보니 막차는 당연히 패스하고 주머니에 만원 넘게 돈이 있으면 찜질방에서, 해장국 사 먹을 돈밖에 없으면 학교 동아리방 바닥에서 박스를 깔고 자곤 했다. 아침이 되면 좀비처럼 일어나 학교 앞 순댓국 집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해장을 하고 수업을 들었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술집에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술에 취해 막차를 타면 꾸벅꾸벅 졸다가 핸드폰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종점까지 가 한밤중에 아버지가 데리러 오셔서 혼을 내시기에 차라리 깔끔하게 학교에서 잠을 자는 게 훨씬 나았다. 막차를 타겠다고 아등바등할 바에야 그 시간에 한잔이라도 더 먹고 우정을 다져보자가 우리 패거리의 신조였다.
사회로 나와서도 소주는 언제나 함께였다. 막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점심시간에 아저씨들이 종이컵 가득 채워줬던 소주 한 잔은 내 인생 최고의 한잔으로 기억된다. 대학로에서 하루 공연이 끝나고 나서 술잔을 기울이던 뒤풀이도 그 다음날 출근이 정오쯤이었기에 부담 없이 밤새 소주를 먹곤 했다. 심지어 자취까지 시작했으니 혼낼 사람도 없고 동료들이나 친구들도 자주 놀러 와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대학로에서도 멀지 않고 자취방 근처 수유시장에서 만원이면 푸짐한 안주가 준비되기에 술쟁이들에게 우리 집은 최적의 장소였다. 공연일을 그만두고 서점에서 일을 시작할 때 팀장과의 사전 만남도 포장마차에서의 소주 한잔을 곁들인 간이 면접이었고 그 직장이 마침 종로였기에 퇴근 후 팀원들과 소주 한잔 두 잔 기울이고 집에 오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공연장 일을 할 때부터 지인으로만 알았던 쏭과의 사랑도 소주 한잔을 함께 먹으며 불꽃이 튀어 시작되었고 결혼 허락도 장인어른과 소주 한잔을 함께 하면서 받았기에 소주는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술도 먹기는 하지만 소주만 못하다. 맥주는 배가 불러서 못 먹고 서양 술들은 너무 독하다 보니 목이 아파 못 먹겠다. 그나마 사케나 백화수복 같은 청주는 입에 맞지만 가성비 면에서 떨어지기에 소주가 나에겐 최고의 술이다.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시지는 않고 저녁 반주로 가볍게 한병 정도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물론 너무 자주 먹기에 줄여야겠다는 생각은 매일 아침마다 들곤 하지만 하루 배송이 끝나가는 저녁이면 맛있는 메뉴에 반주 한잔을 상상하며 군침을 흘리기에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최대한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쏭과 호은이 좋아하는 메뉴로 준비를 하지만 그것조차 안주라고 생각하면서 하기에 더 맛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맛있는 저녁상이 곧 맛있는 주안상이기에 저녁 한 끼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내 인스타 릴스와 유튜브 숏츠 알고리즘의 대다수는 안주 레시피가 차지하고 있어서 맛있어 보이는 메뉴를 보면 눈이 번쩍 뜨여 저장하고 어떻게든 비슷하게 만들어 보곤 한다.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오르내리고 멀리 걸어 다니며 배송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살이 빠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게 만드는 저녁 술상 때문인 듯한데 그 소주 한잔의 유혹을 떨치지 못함이 참 부끄럽기도 하다. 내 뱃살에게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내 혓바닥이 맛있다고 포기 못하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오늘 저녁은 릴스에서 보고 만든 스위스식 감자전과 밀키트로 산 소불고기였다.
역시 대성공이었기에 배부르고 맛있게 소주 한 잔 잘도 곁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