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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May 10. 2022

충분히 사랑한 자의 특권


건우는 꾸준히 상담을 오는 학생이었다. 한주의 상담 스케줄을 펼쳐보면 언제나 수요일 오후에 건우의 상담이 예약되어 있었다. 문제는 건우는 상담에 오는 것에만 성실했다는 점이다. 상담 중에 나와 했던  약속이나 과제에 대해서는 성실하지 않았다. 아, 선생님 이번에는 까먹었네요... 선생님, 지난주에는 아파가지고요.. 핑계는 날로 늘어갔다. 상담은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나가려는 의지가 없이는 진전될 수 없다. 대여섯 번의 상담 동안 끈기 있게 건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야 했던 이유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


선을 그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상담이 진행되는 것은 상담자와 내담자 모두에게 좋은 시그널은 아니었다. 수요일 오후, 긴장되는 마음으로 건우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날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호주머니에 사랑을 숨겨두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건우야, 오늘은 선생님이 먼저 이야기를 좀 할게. 이 이야기를 듣고 네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다시는 선생님을 보러 오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도 들어볼래?"


갑작스러운 나의 단호한 말투에 긴장한 듯한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 주려는 마음은 전혀 아니고, 건우 스스로가 지금  상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려는거야."


"......"


"건우는 그동안 매주 상담에 왔지만 선생님이 주는 과제는 거의 하지 않았어. 이런 상태로 상담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봤어. 건우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게 이번 주는 하려고 했는데 중간고사가 겹치고 해서... 죄송해요..."


"이번 주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아마도 건우가 선생님과 약속만 안 지키는 건 아닐 거야. 타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선생님은 건우가 움직이지 않으면 계속 도움을 줄 수 없어. 그래서 다음 주 상담 예약된 것은 선생님이 취소를 했어. 건우 스스로가 생각을 좀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주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


"건우가 할 이야기가 있으면 말해도 되고, 더 이상 할 이야기 없으면 가도 좋아"


건우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앞으로 건우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기로 했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럴 때, 그 기준은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도 상대에게도 큰 상처가 된다. 


누군가에게 거리를 두어야 할 때, 나는 세 가지를 자문해본다.


첫 번째 질문은 '나는 그동안 상대에게 충분히 사랑을 주었는가?'이다. 지금 내가 그와 거리를 두는 결정을 한다고 해도, 나의 이 선택으로 그와의 연결이 이것이 마지막이 된다고 해도, 그것이 상대를 살리는 일이라면 행동해야 한다. 단, 그가 느끼기에 충분히 사랑받은 기억이 있을 때에만. 설령 지금 그가 상처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이 순간을 떠올렸을 때, 그때 그 사람이 나를 살리려고 그랬구나, 하고 알아지며 그것이 상처에서 깊은 사랑으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조건 없이 사랑받은 사람은, 그것이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오래도록 그 장면에 기대어 살아가게 된다고 믿는다.  


두 번째 질문은 '상대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는가?'이다. 내면의 힘이 있는 사람만이 '거리두기'를 상처로 받지 않고, 자기반성과 성찰로 가져갈 수 있다. 


마지막 질문은 '나의 이 행위가 상대를 살리려는 의도인지,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의도인가?'이다. 이 행위에 대한 나의 순수한 의도에 대해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질문이 가장 여러 번 해야 할 질문일지 모른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옳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 주는 행위를 행한다. 특히 내가 상대보다 연장자이거나 힘이 있는 자리에 있을 경우는 더욱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일이다.


건우는 한 달 만에 다시 상담을 신청했다. 한동안은 선생님을 원망했다고 한다. 누구도 자신에게 그렇게 정중하게 선긋기를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그동안의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건우. 이후 상담에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탐구해나가는 건우를 만날 수 있었다.  


사랑을 백 퍼센트 준 사람이 사랑을 회수할 때, 비로소 그 사랑의 힘이 드러난다. 그것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닐까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전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이 가진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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