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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Dec 13. 2022

유효기간


올봄에는 한 달반 가량 제주에 머물렀다. 노트북, 옷, 책 등을 가지고 갔는데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은 여러 벌 챙겼는데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 두어 벌을 주로 입었다.


그때 문득 집에 있는 물건들을 떠올렸다. 이것저것 필요해 보이는 것을 끌어들여서 집에 데려다 놓고는 정작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가 하고. 그 아이들도 자기가 쓰이길 바랄 것인데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어떤 마음일까 하는.


어디에 가든, 내가 잘 쓰일 때가 행복하다. 내가 필요하다는 듯 나를 채용해놓고는 일거리는 하나도 주지 않고 가만히 놔둘 때가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법.


1년을 정돈하는 12월. 냉장고를 보니 유효기간이 지난 소스들.. 2022년 10월, 2022년 5월.. 유효기간이 지난 것들을 빼면서.. 모든 것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음식들은 친절하게 유효기간이 적혀있지만, 사물에는 유효기간이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모두 각자의 유효기간이 있지 않을까. 혹 내가 너무 오래 데리고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오래 가지고 있던 생각 빼기도 꼭 필요하겠구나, 어떤 생각을 빼야 할까? 어떤 감정이 유효기간이 지났을까?


오래된 서랍,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조금씩 빼기 시작했다. 어떤 물건은 내 오랜 생각과 감정이 묻어있어서 쉽게 버려지지 않았고, 그러함에 놀라기도 했다.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이 담긴 무엇을 지니고 있었구나...


물건마다 사연이 있고, 버리려고 하면 추억이 말을 건다. 조금씩 빼기 하다 보니 공간이 생긴다. 물건이 빠지고 나니 그 물건에 붙어있던 생각도 빠진다. 뜬금없이 몇 년 만에 어떤 사람이 떠오르고 그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구나, 미안합니다.. 하고 흐르게 된다. 고맙습니다.. 하고 감사로 흐르게 된다. 비워진 공간이 사랑과 감사로 채워진다.


비움과 채움, 그 사이로 사랑이 흐른다.

내 사랑은 비움과 채움 너머(beyond)

유효기간은 만년이었으면 한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영화, <중경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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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모 #애플작가 #유효기간 #빼기 #중경삼림 #사랑과감사 #내사랑의유효기간은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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