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이모 Jul 23. 2023

너에게 담겨도 될까


가끔 전화가 오면, 목소리를 가다듬고 명랑한 척 전화를 받는다. "응, 잘 지내. 컨디션 좋아. 그럭저럭 재밌어. 일이 많이 들어와. 바쁜 게 좋은 거지." 그렇게 통화를 마치면 명백히 쓸쓸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괜찮은 척'. 마음 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담겼으니 그건 사랑이 아니겠는가. 안심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담겼으니 그건 기필코 사랑. 그런데 그 사랑은 어쩐지 쓸쓸하고 외로운, 혼자 사랑.


너는 나에게 그러지 않았으면. 너는 나에게 네 힘든 모습 보여줬으면. 혼자 하는 사랑하지 않았으면. 얼마큼 커지면 너는 내 마음 염려하지 않고 너를 다 보여줄까, 얼마큼 허술하고 만만하면 너는 나에게 안아달라고 말하며 어린애처럼 울까. 나는 거대하면서 안정적이고 따뜻하면서 차분하고 허술하면서 비어있는 그릇이고 싶어. 그래, 그녀는 큰 그릇이니까 이런 내 마음 보여줘도 흔들림 없이 나를 안아줄 거야,라고 생각되면 좋겠어. 그래, 그녀는 나만큼이나 빈틈있고 여리니까 이런 내 마음 보여줘도 나를 우습게 보지 않겠지, 같이 울어주겠지,라고 생각되면 좋겠어.


나는 네가 뻔뻔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유치하고 실없이 살았으면 좋겠어. 네 감정 잘 느끼고 잘 드러내었으면 좋겠어. 내 앞에서는 아프면 '호'해 달라고 말하고, 슬프면 막 슬퍼하면서 울고, 기쁘면 낄낄대고 웃고, 행복하면 엉성하게 막춤도 추고. 나는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 너는 그런 작은 것들로 금세 향기로워지는, 세상에 단 한 송이 꽃.


그동안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꾹꾹 눌러 담긴 너를 활짝 피어나게 하고 싶어.

꽃이 있어야 성립되는 사물.

나는 너를 따스하게 담아주는 화병이고 싶어.


꽃에게 화병 같은 것, 새에게 새장 같은 것

사람에게 그것은 사람이 아닐까.

너라는 생명이 사는 집,

내가 그 집이 되어도 될까.

너라는 화병에 안겨

나 역시 화사하게 피어나도 될까.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들꽃도 좋지만

인생의 한 시절,

너를 담고 너에게 담겨도 될까.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걸어 다니는 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