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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Sep 26. 2023

그리움이라는 걸


"그건 정말이지 못된 감정이야. 시효도 길어. 우리를 뜨겁게 하는 것들! 사랑! 질투! 원망! 이런 건 다 금방 증발하는데 우리를 하염없이 가라앉게 만드는 이 감정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길어.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체는 잠잠해지나 봐."


지난주 국립수목원을 거닐고 왔다. 좋았다. 참 좋았다. 아 여기 살고 싶다,라는 생각에 서성였다. 숲은 늘 내게 유혹적이다. 연둣빛 하늘에서 햇살이 한 줄기 빛을 내뿜는 순간, 천선란의 소설 <랑과 나의 사막>의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사막이 배경이고 로봇과 외계인이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뭉클하고 가슴 언저리가 따듯해진다. 로봇 '고고'는 로봇이기에 감정을 가질 수 없지만 서서히 감정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한다. '감정'이란 것을 느끼는 최초의 순간, 인간도 혼란스러웠을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두려움'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순도 100%의 두려움이었을까. 신기함과 경이로움, 설렘, 지난 생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도 조금은 섞여있지 않을까. 자신의 인간반려자 '랑'의 죽음으로 시작된 로봇 '고고'의 긴 여정은, 우리들 안에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어떤 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떠나는 여정과 닮아있다.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오해하는 거야,라는 문장이 좋았다. 오해하는 것도 흐르는 거구나. 그것도 교류구나... 안도하게 되는 마음. 나의 것이 너의 그것과 겹쳐지고 스며들고 버무려지고 옮겨가면서 우리, 살아가고 있구나. 오해하며 사랑하고 있구나.


사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라나는 선인장을 떠오르게 하는 곳. 생명이 뜨겁게 가을을 맞이하는 수목원을 거닐며 나는 그리움 비슷한 감정에 시달렸다. 시효가 길어서 그런 걸까. 뜨겁던 사랑도 그러했고 지겹던 미움도 그러했으나 그리움은 여전하다. 가슴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는 이 그리움은 말없이 자라나는 식물을 닮았다. 평소에는 자라는 줄도 모르다가 그리움의 알람이 울려 고개를 돌려보면, 아름답고 무성하게 자라있는 그녀들. 식물들은 어쩐지 '그녀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움은 못된 감정 아니야, 가장 깊고 짙은 사랑이야,라고 속삭여주는 그녀들 곁을 오래 거닐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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