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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Oct 27. 2023

열매가 익도록 내버려 두어라


제주에 머무르고 있다. 아침 산책길, 돌담 너머에 귤나무가 한창이다. 길가에 떨어져 있는 것을 하나 주워서 까먹었다. 아이코, 시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아직 푸릇한 아이들이 제법 보인다.


"열매가 익도록 내버려 두어라."

어디선가 들은 이 말이 문득 떠올랐다.


늘 열매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조바심 내는 나에게 해 주는 귤신의 말인가. 나무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성장하고 있다. 태양과 바람과 공기와 달과 별과 눈과 비와 대기의 온갖 미생물들과 교류하면서. 때가 되면 인연이 되면 열매는 익는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환경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저 피어날 뿐. 시멘트 틈에서 자라난 식물에게 왜 하필 여기서 피어났니?라고 물어보아도 대단한 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겠지. 씨앗이 여기 있었으니까.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귀농하신 분이 혼자 수많은 과일나무를 키우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제가 씨앗을 이곳에 놓긴 했지요. 그 후로는 다 같이 키웠지요. 물, 바람, 곤충... 저절로 돋아나는 것 같지만 저절로라니요. 다 같이 키운 나무예요. 제 것은 아니지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도 다 같이 서로를 자라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지나치는 동네 주민과 맞은편 차선에서 안전하게 운전해 준 사람과 사랑합니다 고객님, 친절한 고객 센터 직원과 길가에 작은 고양이와 덤으로 하나 더 얹어주신 과일가게 아저씨와 기분좋은 가을 바람과 엘리베이터를 잡고 기다려 준 중학생 친구.... 그 모든 아는, 모르는 소중한 인연 덕분에 '나'라는 존재가 자라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바심이 난다. 언제나 그렇다. 그럴 때는 최명희의 '혼불'에서 백 번쯤 읽어 본 문장을 다시 써 보고 발음해 본다. 학창 시절 만난 이 문장을, 나는 얼마나 여러 번 발음해 보았는가. 그러는 동안 얼마나 안도했던가.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해도 달아날 수 없고.

지금 너한테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 최명희 '혼불' -



일이든 돈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든 인연이 하는 일.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알면서도 조급해진다. 조급해하고 있구나, 알아차리고 흘려보낸다. 물 한 모금 담아줄 수 있는 넉넉한 존재로,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지금 여기를 산다. 열매가 익어 떨어질 때를 의심없이 기다리는 것. 익지 않은 귤이 제대로 된 맛과 향을 내지 못하듯이, 억지로 이어 붙인 인연은 늘 그만큼만으로 수명을 다한다. 11월은 본격적으로 귤을 수확하는 계절이다. 맛 좋은 귤을 만나려면 지금부터 한 두 주쯤은 기다려야 한다. 귤나무 혼자서는 그 노오란 금빛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수 없다. 수많은 손길이 어루만져 주고 있을 것이다. 오며 가며 기특하게 바라봐줘야지. 그렇게 내 눈길도 한 스푼 보태야지. 귤 하나가 입안 가득 단맛을 풍겨내며,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제주에 좀 더 머물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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