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장을 보러 시장에 가다가 이모가 준 백에서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 엄마가 할머니의 민증을 보더니 "엄마 얼굴 오랜만이네"라고 했다. "나한테는 이 얼굴이 우리 엄마야"라고. 이번에도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나도 많이 사랑하고 보고 싶지만, 오늘의 바람은 온전히 엄마에게 부는 것이니까. 오랜만에 찾아와 줘서 고마웠어요. 언제나 애틋했던 전분씨. 늘그막에 나를 키운 사람의 이름. 물을 먹으면 끈적해지는 여름의 전분씨. 당신 딸은 여전히 착하고 아름답고요. 늙을수록 당신을 닮아갑니다.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중에서..
글을 쓰기 전에, 필사 한 장 하는 것이 요즘 나만의 리츄얼. 김민정 시인이 강연에서 산문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라는 어떤 분의 질문에 '고명재 시인 산문집을 필사해 보세요.'라고 답변하셨다. 나는 마음이 동하면 말을 잘 듣는 편. 바로 실행하는 편. (자주 동하지 않는 게 함정) 오늘은 '전분씨' 이야기. 나의 엄마가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일 년에 한 번도 떠올리지 않고 살고 있었군요. 그녀는 그녀를 닮았겠지요. 세상에. 나도 그녀를 닮았겠군요.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일이다."라는 고시인의 문장을 곱씹어봅니다.
거 참 신기하네요. 한 장 필사했을 뿐인데 민정 시인님 말씀대로 글이 막 쓰고 싶어 지네요. 나의 그녀들에 대해. 초등 저학년 때 돌아가셔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외할머니에 대해 어떻게 쓸 거냐고요. 그런 건 걱정도 하지 마셔요. 엄마한테 자기 엄마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고 할 거랍니다. 엄마도 자기 엄마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어야지요. 그렇게 그리워하고 사랑할 시간을 줘야지요.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흘리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나는 그런 엄마를 꼭 안아줘야지요. 살아있을 때 곁에 있을 때 더 만지고 많이 쓰다듬어 드려야지요. 어릴 때 쓰다듬받은 반에 반에 반절도 못 돌려드렸으니까요. 엄마한테 엄마가 돼 주어야지요. 자기 엄마에 대해 말하는 어린 엄마는 행복하겠지요. 내가 아는 그녀에 관한 작은 이야기는 꽃밭을 아름답게 일구셨다는 이야기. 시골 양반인데도 눈썰미가 있어서 고운 스웨터를 해 입으셨다는 이야기. 그녀를 닮아 나도 꽃과 시와 춤, 이런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애정하는가 봐요. 밤늦게까지 그녀들의 이야기를 귀를 다섯 개쯤 달고 들어야지요. 듣는 것이 사랑이니 사랑을 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