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뭔가 있을 줄 알았음
1. 퇴사하겠습니다.
"너 그만두면 뭐 할 건데?"
"너 이제 마냥 어린 나이 아니야"
"거기 가면 좀 뭐가 달라질 거 같아?"
퇴사를 통보하고 나서 상사한테 들었던 말들이다.
예상한 말들이었고 예상 답안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막상 주절주절 입 털기가 귀찮았다.
"지금부터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한마디만 남기고 퇴사 절차를 밟았다.
나올 때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퇴사 통보 한 달 뒤 회사를 나오는 내 발걸음과 그때 그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 첫 회사이자,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정말 사랑했고 정말 많이 사랑받았던 회사였으니까.
하지만 물론 만만치 않게 지지랄랄 맞은 시간들인 것도 맞음.
인터넷 방송, 드라마, 예능 모든 미디어 콘텐츠 광인이었던 아이는 프로덕션에 입사하여 길고 긴 짝사랑을 끝냈다.
실제로 일하는 내내 미친 듯이 재밌었음.
예능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닌 라이브의 맛을 제대로 보게 된 첫 취업이었다.
엉덩이 무거울 틈 없이 돌아가는 촬영 준비.
숨 막히게 긴장되는 라이브 촬영 현장.
내가 구성한 콘텐츠로 진행되는 프로그램.
때로는 실수도 하고 버벅였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프로덕션에서 나 역시 버둥거리며 함께 올라갔다.
그 중에서도 짜릿했던 건 간혹 가다 연예인도 볼 수 있다는 거였다.
물론 내가 사랑하는 K 아이돌은 아니어서 관심은 없었다만. 아쉽지만 대부분 개그맨이거나 배우였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모든 방송사 프로덕션이 그러진 않겠지만 총괄 프로듀서의 폭언이 정말 레전드였다.
뭐 이거는 사내 괴롭힘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
실수하면 '뇌사상태냐' 키 작은 피디님한테 '무릎 밑으로 다리 잘렸냐'
뭐 이런 의학적인 질문을 하시는데 솔직히 말투가 개 웃겨서 뒤쪽에서 몇 번 쪼갰다.
아 근데 나도 욕 처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공범 아님 주의.
'여자도 때린다' '내가 ㅈ만하냐' 이런 말들을 들어야 했는데 지금 보니 젠더감수성 레전드.
근데 이 정도는 귀여운 듯. 더 멋진 명대사 많이 쏟아내심.
훨씬 더 개 같은 대사가 많았지만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더 하면 잡플래닛임.
아직 사회생활을 잘 모르는 MZ 사회 초년생의 잘못이 0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눈치 없고 뭐든지 이유가 궁금했던 22년도의 나는 아마 얄미로움을 온몸에 장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인간이 개자식인 건 맞잖아요?
한 때 집구석 키보드오브레전드였던 나는 상상쌍욕과 상상살인으로 그 시간들을 버틴 것 같다.
나름 유능한 키보드 워리어로 활약한 전적이 있음.
그리고.. 상사 뒷담만큼 재밌는 게 없잖아 사실.
누군가 듣는다면 빵에 갈지도 모를 뒷담을 함께 했고 덕분에 우리 프로덕션은 참 돈독했다.
아마 그분은 불멸의 삶을 얻게 되지 않을까?
사실 그 빌런 때문에 그만둔 건 아니다.
일도 재밌고 다른 분들에게 일적으로 인정도 받았기 때문에 1년 넘게 마냥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인생에 무용담이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기 좋은 재료였다.
그분 덕분에 미디어에 계속 가는 게 맞는 건지 의심한 시간이 많았지만, 씹을 안주를 많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가성비를 인정받아 마땅하다.
다만 1년이 지나자 영상을 향한 욕구는 채워졌지만, 코미디/예능 욕구는 채워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너무 이른 욕심이었겠지만 더 재미있는 걸 하고 싶어 지는 게 문제였다.
내 인생은 과장, 웃음 빼면 셀룰라이트만 남을 것임. 사실상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이상형인.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생동감 넘치고 재미있으나,,, 내가 원하는 만큼 웃을 수 있는가?
답은 아니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고민의 여지없이 해외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뭔가 뜬금없는 생각의 전개 같겠지만.
유잼 에피소드 수집하러 갔다는 게 전주이씨계의 정설.
그래서 떠났다.
한국보다 재밌을 거라는 어떤 기대와 함께.
아직까지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자 최괴의 경험이라고 생각되는 어학연수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ㅋ
그만두고 할 것도 없고, 은근히 늙었고, 가도 딱히 달라질 게 없었던 인간의 인생 2막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