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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없는 외국인들

2부(진짜이민)

by 김미현


우리 가족에게는 이민 과정에 함께 하게 된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제부도 바닷가에서 맥주 한 캔으로 시작된 인연,

독일인 K였다.


남편은 직업상 한국에 남았다.

그래서 아이와 나는 K와 함께 독일에서 살기로 했다.

세대가 다른 작은 공동체였다.

아이는 학생, 나는 엄마, K는 이민의 짐을 함께 나누는 또 다른 어른이었다.




K가 먼저 독일로 건너갔다.

하지만 정착할 집은 없었다.

에어비앤비 숙소 체류가 연장되고 또 연장되었다.

두 달 가까이 흘러갔을 때,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K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주인이 너희를 보고 싶어 해.

지금 당장 짧게라도 비디오를 보내 주는 게 좋겠어.

부탁해. “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미 한 차례 다른 집주인을 위해 정성껏 영상을 만들어 보낸 적이 있었다.

가족 소개, 아이의 웃는 모습, 소박한 일상까지 담아 자막을 달아 보냈다. 그러나 답은커녕 확인했다는 표시조차 없었다. 이번 요구는 그래서 더 황당했고 불쾌했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자던 아이를 깨웠다.

“미안, 조금만 도와줘야 해.”

혹시 투정을 부릴까 걱정했는데, 아이는 눈을 비비며 담담히 말했다.


“찍자, 엄마.”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작은 어깨가 얼마나 간절한지, 이민이 얼마나 아이의 꿈인지 그대로 느껴졌다.

우리는 잠옷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앉아 자기소개를 했다. 완벽할 수 없었지만, 아이가 또박또박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영어 자막을 달았다. 그날 밤의 영상을 보낸 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는 역시 거절이었다.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며칠 뒤, 이미 다른 세입자를 구했다던 집주인에게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첫 번째 계약자가 에어컨 문제로 집에 들어오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타처럼 불려 갔다.

선택지는 없었다.


월세는 한국 대기업 대리의 한 달 급여를 고스란히 쏟아야 하는 수준이었고, 에어컨 값은 또 한 달 치 급여만큼을 요구했다.

놀람과 체념이 뒤섞였다.

하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우리는 결국 계약을 했다.

생애 처음으로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3층 주택, 지하까지 합치면 4층 규모였다.


그 집을 계약하면서 우리는 K와 한 지붕 아래 살기로 했다.

비싼 월세는 모두에게 큰 부담이었기에 반반씩 나누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뿐 아니라, 낯선 땅에서 원어민과 함께 지낸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에게 심리적인 든든함이 되었다.

한국에서 우리가 K를 도왔듯, 이제는 반대로 K가 우리를 돕는 상황이 된 셈이었다.


집주인은 근처의 김나지움까지 추천해 주었다.

마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뒤, K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 학교가 학생을 받을 수 없다고 해.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렸어. “


나는 핏줄이 서늘해졌다.

이미 아이의 담임선생님께 추천서를 부탁했고, 2년 치 성적표를 공증 번역까지 마쳐 독일로 보낸 상태였다. 그런데 약속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전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K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무너져가는 집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날 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숨이 막혔고, 등줄기를 타고 불길처럼 뜨거운 통증이 번져갔다.

다음 날 아침, 거울 속에 비친 내 등에는 작은 물집들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대상포진이었다.



#이민기록 #해외정착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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