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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난 천사

1부(가짜이민)

by 김미현


낯선 곳에서는 작은 일도 크게 다가온다.

특히 지쳐 있을 땐, 아주 사소한 친절조차 눈물이 날 만큼 고맙다.

그날 우리가 만난 한 사람도 그랬다.

나는 지금도 그를 “천사”라고 부른다.




독일의 여름은 습기가 거의 없다 했다. 말은 맞았다.


하지만 태양은 한순간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늘은 맑았고,

거리에는 반소매 차림의 독일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그들 속에 우리도 섞여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주저앉았다.

허리가 아프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내 아이가 아직 열두 살이라는 사실을.

멀리서 보면 씩씩해 보여도,

낯선 땅의 무게는 결국 아이의 작은 어깨에 얹혀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아이의 머리를 다리에 눕혔다.

땀으로 젖은 얼굴, 찡그린 표정.

그 모습을 들여다보며 속으로 수없이 자책했다.

운동화를 챙기지 않은 게 왜 그리 큰 잘못처럼 느껴졌는지,

작은 실수 하나가 이렇게 무겁게 다가온 날이었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Do you need help?”

(도와드릴까요?)


낯선 억양이었지만, 목소리는 따뜻했다.

나는 고맙기보다 먼저 두려웠다.

낯선 곳에서 살아남는 법은 언제나 경계하는 일이었으니까.


“Thanks. But we’re okay. His father went to the pharmacy.”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아이 아빠가 약국에 갔거든요.)


사실 남편은 약국에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작은 거짓말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내 방식의 방어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아들은 그 따뜻한 시선을 느꼈는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버틸 힘이 생긴 듯했다.


잠시 뒤,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그가 차를 타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창문을 내리고 나를 불렀다.

그리고 차 안에서 차가운 탄산수 한 병을 꺼내 내밀었다.


“Give it to your boy. Have a good trip.”

(아이에게 주세요. 즐거운 여행 되시고요.)


햇살에 물방울이 반짝였다.

나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낯선 이의 손에서 건네받은 건 물 한 병이 아니라

마음을 식히는 손길이었다.


아들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엄마, 그 아저씨 진짜 착하다.”

그 한마디에 내 눈시울이 또 뜨거워졌다.





처음에는 정중히 사양했는데도,

그는 다시 차를 몰고 와 우리 앞에 멈췄다.

그 마음이 내겐 오래 남았다.


얼굴은 이제 흐릿하다.

약간 그을린 피부, 선한 눈빛, 짧게 자른 머리칼.

그러나 미소와 물병을 건네던 그 손길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낯선 땅에서 받는 도움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다.

그건 살아갈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지금도 “천사”라 부른다.




며칠 뒤, 다시 그 벤치를 지날 때 아들이 물었다.

“엄마, 그 아저씨는 우리가 힘든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대답 대신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직은 몰라도 괜찮았다.

사람의 눈에는 말보다 더 많은 게 담겨 있다는 걸,

언젠가 이 아이도 깨닫게 되리라 믿었다.


우리가 낯선 땅에서 받은 건 단순한 물 한 병이 아니었다.

그건 길 위에서 다시 걷게 만드는 힘이었다.


언젠가 아들도 누군가에게 그런 손길을 내밀 수 있기를,

나는 오래도록 바랐다.


#해외생활 #가족에세이 #10일간의 가짜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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