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쳐주신 조상님들 덕분에 전국의 학생들은 독립된 국가에서 우리말로 된 교육을 받음과 동시에 침대에서 뒹굴거릴 수 있는 시간을 하루 더 얻게 되었다. 봄방학동안 숙제도 없이 놀던 아이들은 삼일절이 되면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 가기 싫어!'를 외치지만 결국 다음날 학교로 갈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올해는 일요일의 도움으로 하루가 더 늘어났다.야호!)
선생님들도 '학교 가기 싫어!'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건 3월이 아니라 2월 말부터다. 새 학년 준비 기간을 두고 새로운 학년과 업무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윤아는 자신의 손으로 극악의 선택지인 4학년을 골랐으므로 자신이 4학년 담임이 될 것임을 예상했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것은 학급이다. 누가 프로민원러 반을 맡을 것인가?
'제발 내가 아니기를!'
누구에게 비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윤아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어쩌면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인생의 본질을 다시 한번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가위바위보해서 지는 사람이 설거지하자고 말하면 말한 사람이 져서 설거지하는 게 인생 아니던가.
"좋아요. 우리 그럼 4학년으로 써요!"
몇 주전 K에게 4학년을 외쳤던 윤아는 4학년 2반이 되었다. 각 선생님들의 학년과 반이 공개되자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모두들 안도함과 동시에 윤아를 위로했다. 윤아가 프로 민원러의 전담 민원 처리반이 된 것이다. 윤아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나 삶을 되돌아보았다. 이 학교에 온 것이 잘못이었나? 아니다. 이곳에서 K를 만나지 않았나. 그렇다면 선생님이 된 것이 잘못이었나? 그렇다. 그렇구나. 교대에 간 것부터가 잘못이었음을 윤아는 깨달았다. 그때 수능을 더 잘 봤어야 했는데. 아니지 차라리 수능을 못 보는 게 더 현실적이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던 윤아는 K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윤아 선생님, 괜찮으세요?"
"K선생님, 저 어떡하죠?"
"제가 옆 반에 있잖아요. 힘들면 찾아와요."
프로 민원러라는 네임드 인물을 피했기에 상대적으로 안심했을 뿐 다른 반도 사정은 좋지 않았다. K가 담임인 4학년 3반에도 꽤 유명한 선택적 분노 조절 장애가 있었다. 진짜 분노 조절 장애면 병원에 가서 맞는 약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이 아이는 학교에서만 선택적으로 분노하는지라 아직도 못 고치고 있었다. 선생님이 아무리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호자에게 말해도 보호자는 그럴 리가 없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아는 K에게 반지원정대 호빗이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호빗이요?"
"그 있잖아요. 반지 찾아다니는 난쟁이들이요. 레골라스는 활이 있고, 아라곤은 검이 있고, 간달프는 마법을 부리는데 호빗은 맨발로 다니잖아요. 우리는 절대 반지 찾으러 가면서 신발도 안 신은 호빗들이에요"
K는 윤아의 마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프로 민원러와 선택적 분노 조절 장애 앞에 교사가 가진 무기는 없다. 무기를 잘 못 꺼내 들면 아동학대자가 될 수도 있으니 차라리 맨발이 안전할지도 모르지. 윤아는 호빗처럼 키가 쪼그라든 느낌이 들었다.
그때 K가 말했다.
"윤아 선생님, 그래도 그 영화에서 호빗이 주인공이에요."
외유내강을 사람으로 만들면 그건 바로 K일 것이다. 그의 나긋나긋한 한마디가 쪼그라든 윤아의 키를 조금 늘려주었다.
"그리고 호빗은 쪽수가 많잖아요."
게다가 K는 통찰력도 갖췄지 않나. 윤아는 K와 함께라면 4학년 담임으로서의 모험을 시작해 봐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모험을 떠는 호빗들은 주섬주섬 가방 꺼낸다. 그리고 가방에 희망, 인내심, 동료애 같은 것들을 챙긴다. K와 함께라면 지옥불에서 무사히 걸어 나와 절대 반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데요 윤아 선생님, 우리가 찾는 절대 반지는 어디다 써요?"
"들고 교감선생님한테 가야죠. 가서 말하는 거예요. 올해 4학년 했으니까 내년에 5학년 못하겠습니다!"
"아...."
절대 반지의 위력이 생각보다 시원찮아서 실망했대도 호빗들은 계속 모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