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나나의 기괴한 일상> 1화

by 아포드

그녀의 이름은 '나나' 홧김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불안함과 초조함을 마음 한구석에 덮어 둔 채 달고도 씁쓸한 이 휴식기를 보내고 있는 만화가 지망생 겸 취업 준비생이다. 오늘도 미지근한 오후의 공기와 커튼 뒤에 숨어 은은한 주황색을 띠고 있는 햇살에 눈을 뜬다.


“우음.. 벌써 오후 두 시잖아? 12시쯤인 줄 알았는데.. 아! 내 하루가!”


깊은 새벽까지 웹 소설을 읽은 대가로 얻은 피곤함에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는다. 원래대로라면 엄마가 방에 진작 쳐들와 이불을 끌어내리면서 타박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조용하다.


“후우.. 이제 밤늦게 웹 소설 읽는 건 그만두려 했는데, 하필 이럴 때 BL 신간이 눈에 띌게 뭐람.”


"아.. 아! 흠! 흠!"


나나는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가기 전에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이 시간에 잠에서 막 깬 목소리로 엄마와 마주치거나 하면 이제야 일어난 거냐며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방문 손잡이를 잡는다.


“탈칵. 끼익.”


문을 열고 나가 보았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최근 집에만 있느라 무뎌진 요일 감각을 더듬어 보니 오늘은 토요일이고 결혼식을 앞둔 오빠 ‘휘곤’의 상견례가 있는 날이라 나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일찍 준비하고 나간 모양이다.


평소에 휘곤과 앙숙인 나나는 며칠 전에도 사소한 문제로 휘곤과 다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조만간 있을 상견례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남매의 행각에 질려버린 부모님들도 차라리 나나를 상견례에 데려가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다.


상황 파악을 마치고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나는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오늘은 내게 잔소리할 엄마도 아빠도 귀찮게 시비를 거는 오빠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와 마주치면 하려고 준비해 뒀던 늦잠 잔 것에 대한 변명들도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증발한다.


“아이~ 편해라~! 눈치 볼 것 없이 맘대로 먹고, 놀아야지 꺄륵!!”


나나는 당장 냉장고를 열어 식빵을 꺼내 들고 소파로 달려가 TV를 켠다. 아무것도 발리지 않는 식빵이었지만, 아침의 출출함과 편해진 기분에 식욕이 돋은 탓인지 마냥 맛있기만 하다. 극도의 안락함을 느끼며 소파에 누워 엿가락처럼 몸을 늘어뜨린다. 그런데 그 순간 소파 밑으로 흘러내린 다리에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느껴진다. 몸을 일으켜 소파 밑을 보니, 아빠의 아코디언이 눈에 보인다.


나나의 아빠는 정년퇴직 후 취미로 아코디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밤새 시끄럽게 연습 해대다가 거실에 그냥 방치하고 안방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나나는 신경을 끄고 TV로 시선을 돌리려다 불현듯 다시 아코디언을 노려본다.


“흥! 그러고 보니 요즘 이것 때문에 잠에서 깬 게 한두 번이 아리란 말이지!”


나나는 벌떡 일어나 아코디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퍽! 퍽! 호홋!! 미안하지만 아빠 대신 네가 내 분노를 달래줘야겠다! 아빠한테 이럴 순 없으니까 말이야. 어차피 너한테도 책임이 있잖니!!"


"무거운 만큼 튼튼해서 좋구나! 호홋! 퍽!! 퍽!! 퍽!!”


나나는 호흡이 가빠지도록 신나게 아코디언을 짓밟았다.


“후우, 이것도 운동이라고 다시 배가 고파지네. 음 또 먹을만한 게 뭔가 없나? 앗 저기 삶은 계란이!” 나나는 식탁 한 귀퉁이에서 당장이라도 낙하할 것 같은 삶은 계란을 구해내듯 집어 들었다.


“탁탁..탁탁!!”


식탁 모서리를 이용해 계란을 껍질을 깨던 순간 나나는 어떤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끼잉~~ 하악.. 하악!”


잠시 잊고 있었던 가족 구성원 강아지 “토토” 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토는 오빠가 애견샵에서 분양받은 치와와로 오빠를 무척 따르고 좋아한다. 하지만 나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이유는 토토가 나나를 자기보다 낮은 서열로 생각하고 깔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나는 그 사실을 늘 얄미워한다.


토토는 오빠가 있을 때 더욱 기고만장해서 나나의 방에 맘대로 들어와 오줌을 싸고 방을 어지르기 일쑤다. 게다 나나가 밖에서 돌아와도 자기 집에 들어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꾸짖는 시늉이라도 하면 나나를 보며 공격적으로 짖는다.


하지만 딱 한 순간 토토가 나나에게 호감을 표하는 순간이 있으니 그건 바로 이렇게 나나가 먹을 것을 쥐고 있을 때이다. 특히 토토는 삶은 달걀의 노른자를 가장 좋아하는데 이렇게 달걀을 깨고 있노라면 만사 제쳐놓고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가느다란 네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인다. 하지만 나나는 이런 토토가 너무 얄밉다. 그래서 이 삶은 달걀을 나눠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아~함~~ 냠냠 너무 맛있네~~”


나나는 토토를 약 올릴 셈으로 방금 깐 삶은 계란의 희고 탐스런 흰자를 반으로 갈라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노른자를 꺼낸 후 보란 듯이 한입에 털어 넣는다.


“크르릉! 컹컹!!”


“컹컹!! 컹컹!!”


토토는 더 이상 애교를 부려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챘는지 아니면 나나의 의도대로 약이 오른 건지 하얗고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연신 짖어대기 시작했다.


“ 킥킥!! 짖어대도 소용없다구~ 네가 제일 좋아하는 노른자는 이미 내 뱃속에 있지롱!”


나나는 그런 토토를 점점 더 놀리며 발을 휘둘러 녀석을 주방 밖으로 몰아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꽈악!!”


토토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는지, 작고 뾰족한 송곳니로 나나의 발목을 물고 말았다.


“꺄악 아파!! 얘! 미쳤니?! 나도 네 주인이라고!!”


“그리고 여긴 내 집이야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야!! 알겠니?!!”


나나의 기세에 눌린 건지 아니면 내 발목을 깨물고 만족한 건지 토토는 "투다닥!" 하는 발톱 소리와 함께 마룻바닥을 달려 자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흥! 네까짓 게 숨어봤자지!”


“그래!! 짜증 나는 강아지는 짜증 나는 물건으로 혼내 줄 테야!!”


나나는 아빠의 아코디언을 낑낑대며 들고 와서는 토토가 드나드는 집의 작고 동그란 입구에

바싹 붙여 막아놓는다.


“내 발목을 문 벌이야! 오빠가 올 때까지 그 안에서 반성하라구! 알겠니!? 호호홋!”


기분이 후련해진 나나는 집에 갇혀서 낑낑거리며 벽을 긁는 토토를 뒤로 한 채 집안 여기저기를 어지르며 소란을 떨다가 다시 소파에 비스듬히 눕는다.


“아~~ 소파에 누워 TV 보며 늘어져 있으니 너무 좋다. 비록 재방송이지만 그래도 좋아~ 이런 게 진짜 집이지!”


평소에는 아빠가 매일 거실과 TV를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같은 날은 나나가 자유를 만끽하는 날이다.


“평소에도 이렇게 집을 내 맘대로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좀 더 욕심이 들기도 한다.


“슬슬 지겨운 이력서를 또 써야 하는데.. 그리고 씻기도 해야 하고 아!! 귀찮은 일들은 많고 TV는 너무 재밌어!! 갑자기 치킨도 먹고 싶고! 맥주도 사 오고 싶단 말야!!”


하지만 이미 너무 늦게 일어난 데다 빈둥대느라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식구들이 상견례에서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나는 다시 거실을 뺏기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아~ 혼자만의 시간을 다 즐기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해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난 정말이지 집에서 뒹구는 게 너무 좋다구. 제길! 차라리 집이랑 한 몸이 돼버리면 취업하라는 둥 밖에 좀 나가라는 둥 잔소리도 안 듣게 되지 않을까? 킥킥..”


그렇게 실현 불가능한 공상을 하며 소파에서 남은 식빵을 먹던 나나는 배가 부른 탓이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다가 이내 잠들고 말았다.




“철컥 ,, 끼익”


누군가가 현관문을 여는 듯한 소리에 나나는 잠으로부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히익!! 지금 몇 시지? 아! 난 몰라 졸다가 깊게 잠들고 말았나 봐!!”


순간 나나의 머릿속에는 가족들이 들어와 어질러놓은 집안을 본 후 일어날 상황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 안돼! 방이랑 주방도 정리해야 되고 토토 집 앞에 놓은 아코디언도 치워야 한단 말야!!”


나나는 다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말짱한 정신과는 다르게 몸은 미동도 안 했다. 아니 몸이 없어진 채 의식만 남아있다는 표현이 차라리 정확했다. 순간 가위에 눌린 건가 생각도 했지만 그것과는 뭔가 달랐다. 정신은 너무 생생하고 마치 집안 곳곳에 눈이 달린 것처럼 모든 방과 화장실, 거실, 발코니 등이 한 번에 시야에 느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뭐.. 뭐지?! 내 눈이 이상한가? 그렇다기엔 너무 또렷해!”


“게다 난 분명 거실 소파에 있었는데 왜 화장실 안과 닫혀 있는 방들까지 다 보이는 거냐구!”


당혹감을 금치 못하는 사이에 상견례에서 돌아온 가족들이 현관문을 통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집안이 왜 이리 어질러졌지? 얘! 나나~ 집에 있니?”


나나는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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