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옅은 갈색으로 볶아진 니카라과는 내린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상당히 매력적인 맛을 냈던 기억이 있다. 커피로써의 따끈한 전성기를 한참이나 외면받고서도 그토록 훌륭한 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니 어쩌면 니카라과는 그 전성기라는 것을 규정한 누군가에게 냉소를 보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열기에 데일까 움츠린 혀로 맛을 직시하지 못한 채 후루룩 삼켜 넣었던 그것은 니카라과가 아닌 그저 한낱 열기였노라 말한다. 전성기를 지나온 니카라과는 내려지던 순간의 첫 향기는 이미 폭발하고 더 이상 남아있지 않지만 반전하는 온도를 따라 가려진 맛들을 하나둘씩 비춰내고 긴장이 풀려 넓게 펼쳐진 미뢰 사이사이를 누비며 엄청난 맛의 정보량을 쏟아낸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갓 내린 뜨거운 커피가 제일이라는 정론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단단하게 담합된 정론에 압도당해 커피맛이 어떤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여지는 생략하고 있거나 식은 커피가 맛있다고 외치고 커피 문외한을 자처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겠는가?
혹시 오랜 시간 동안 곁에 두고 단짝처럼 사용해 온 물건이 있는가? 아마도 그 물건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는 사용하기보다는 아끼는데 더 주력하느라 물건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사람이 물건을 살 때는 필요성보다는 설렘과 흥분으로서의 역할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설렘과 흥분이 서늘하게 식고 나서야 물건은 본래의 제맛을 내기 시작한다.
주차하다가 조금 긁혀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탈 수 있는 낡은 자동차, 오늘만 벌써 3번째 떨어뜨리지만 무심하게 주울 수 있는 구형 스마트 폰은 바로 지금이 그들의 역할을 가장 그들답게 해내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다.
사람은 어떨까? 사람도 충분히 식어도 맛있을 수 있다. 아니 식어야 맛있는 사람이 있다.
젊음의 뜨거운 열기와 증기의 안갯속에 가려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느껴지는 자기 본연의 맛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우뚝 서있는 정론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
그렇게 정해진 트랙을 달리며 주변에 따라 잡힐세라 앞만 보고 달리던 어느 날 트랙과 주변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멈춰 서서 허무함과 함께 삶이 식어가는 듯한 순간이 온다. 바로 그때가 오롯이 자기가 될 수 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트랙에 맞춰 직진만 하던 내가 아닌 옆으로 달리거나 혹은 구르는 재주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조용한 주변은 더 이상 비교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새롭고, 설레고, 뜨겁기를 바라는 세상에서도 결국 식어야 오히려 불순물 없이 순도 높은 결정으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가능한 많이 찾아낼 수 있었으면 한다.
온누리에 숨은 식어도 맛있는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