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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울의 보일러 고장

by 아포드

12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아침. 아직 침대 위에서 반쯤 잠들어 있던 나는 평소 보다 좀 더 차갑고 얼얼해진 점막으로부터 낯선 징후를 느끼고 이불속으로부터 왼팔을 내보내 허공에 휘휘 저어 본다. 팔이 많이 시린 것을 보니 역시 점막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지못한 나는 뿌연 시야를 열고 몸을 일으켜 혹시 창문이 열려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을 해본다.


그러나 창문은 온전히 닫혀있었고 조금은 불길한 예감과 덜 깬 잠의 만남으로 심란해진 숨을 뱉으며 잠시 방 한가운데 서 있다가 책상에 놓인 안경을 집어 들어 코 위에 올린다. 밝아진 곁눈 시야에 평소와 같지 않은 어색함이 포착되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빨간 전원등과 실온이 표시되어 있어야 할 보일러 컨트롤러가 먹통이었다.


"아 이런 젠장..."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 수 없다는 사실과 오늘 해야 할 샤워와 설거지 등이 떠오르며 미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자동차 정비에 문외한 사람도 차가 멈추면 답답한 마음에 보닛을 열듯 나도 일단 보일러실 문을 연다.






보일러실에 갇혀있던 냉기의 반갑지 않은 마중을 받으며 차라리 열었던 게 보닛이었다면 따뜻하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보일러를 살피기 시작한다.


물론 나사를 하나하나 풀어 보일러를 해체해 볼 용기는 아직 내지 못했지만 가전에 이상이 생겼을 때 현대인이 처음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전원 플러그를 뽑았다 다시 꽂아보는 것이다.


콘센트와 플러그는 서로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일심동체라도 되었는지 당겨도 분리될 생각이 전혀 없다. 아득한 시간의 무게가 쌓여있는 그들의 진심 어린 애정을 한 손으로 대충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나의 무성의한 모습에 반성하며 고무장갑과 함께 나머지 한 손도 동원해 그들을 강제 결별 시키는 데 성공한다.


일단 콘센트에 전기가 잘 흐르고 있는지 진단해 보기 위해 헤어드라이어를 꽂아 본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신난 듯 작동하는 것을 보니 콘센트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왠지 혼자만 신난 드라이어가 얄미워 얼른 끄고 서랍에 다시 돌려놓는다.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판단과 함께 앞으로 며칠간 한 겨울에 차디찬 물로 지낼 수 있을지 어떨지의 여부를 나 자신에게 묻기 위해 싱크대로 가서 1분 정도 냉수로 손을 씻어본다.


음... 손이 찢어지는 것 같다.


아찔한 상상도가 펼쳐지는 것을 간신히 접어 넣으며 컴퓨터를 켜고 사례를 검색해 보기로 한다.


"보일러 컨트롤러 먹통..."


역시 검색어는 직선적이고 원초적인 게 좋다.


약 10만 원을 내고 보일러 컨트롤러를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다분했으나 검색의 검색 끝에 보일러 본체와 컨트롤러를 이어주는 가느다란 전선 두 가닥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된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보일러실로 다시 향했고 배선을 이리저리 뒤진 끝에 컨트롤러와 직결된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전선 두 가닥을 발견한다.


전선을 만지작 거리자 어느 순간 보일러가 "윙~" 하는 단말마를 내며 몇 초간 가동한다.


"오! 이거였군?"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낡은 부위를 니퍼로 끊어내고 피복을 살살 벗겨 실처럼 드러난 전선을 서로 꼬아서 절연 테이프로 마감해 주었다.











드디어 컨트롤러에는 불이 들어오고 재부팅이 되는 듯 깜빡거리더니 전원 표시등과 온도 표시창에 다시 불이 들어온다. 우여곡절 끝에 세면대에서 미온수로 늦은 세수를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역시 인간은 지구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무 나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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