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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악몽

왜 나만?

by 아포드

한 번은 유년기에 다니던 컴퓨터 학원에서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원생들을 모아 썰매장을 가는 이벤트를 개최한 적이 있다. 난생처음으로 썰매장을 가보게 되었던 나는 들뜬 마음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 그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렸다.


그런데 썰매를 타려면 썰매용 장갑이 필요했는데 부모님은 썰매장에 다녀오는 것은 허락했지만 장갑은 사 줄 수 없다며 그냥 목장갑을 끼고 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썰매장 갈 때 한번 낄 장갑 사주는 건 낭비라는 판단도 들지만 당시의 어린 나는 썰매 장갑을 끼고 기분을 내는 것은 고사하고 목장갑을 끼고 창피를 당할 생각에 삐지고 말았다.


썰매장을 간다는 흥분 때문이었을까, 썰매 장갑을 사주지 않는 것에 대한 삐짐 때문이었을까.

썰매장 가는 날 하루 전에 나는 뭘 잘못 먹었는지 크게 체해서 알아 눕고 말았다. 내일 당장 썰매장을 가야 하는데 시야는 빙글빙글 돌고 속은 메스꺼워서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나아서 다음날 썰매장에 가고 싶었지만 간밤에 3번이나 토하고 너덜너덜 해진 당일 아침의 나는 결국 썰매장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왠지 그 뒤로 내 인생에 있어 썰매장에 갈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썰매장에 가면 안 될 완전무결한 운명이라도 타고난 것일까?




한 번은 고교시절의 크리스마스 시기가 다가오던 어느 날. 교실에 앉아 쉬고 있던 나에게 같은 반 친구가 크리스마스날 뭐 하냐며 자기랑 영화를 보러 가자며 물어왔다. 보러 가자고 한 영화는 '러브 레터'였는데 당시 일본 문화 개방으로 인해 그간 금지였던 일본 문물들이 공식적으로 들어오던 시기라 일본 영화가 극장에 걸린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티켓 또한 친구가 내준다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러브 레터는 한 청소년 관객의 예민한 감수성이 빚어낸 정서의 산물인지 어떤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도 겨울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영화는 설령 스토리가 별로 좋지 않아도 영상과 연출이 아름다우면 충분히 평생 두고두고 볼만한 명작이 될 수 있다는 지금의 내 영화론을 있게 해 준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러브 레터는 스토리도 좋다.)


그렇게 좋은 기억이 담긴 고교시절의 한 페이지를 뒤로 하고 세월이 흐른 뒤 동창들과 연락을 하다가 사실은 나에게 영화를 보여준 그 친구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묘하게 남자답지 않았던 캐릭터로 평소 여성스러운 제스처와 말투로 급우들에게 놀림을 받거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었는데 그럼에도 친화력이 좋고 모난 곳이 없어서 모두와 잘 지내기도 했었다.


여성스러운 특징은 위로 누나가 많아서 그렇다는 알리바이가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은 없었고 그때만 해도 성소수자들이 지금처럼 조명되던 시기가 아니라 신화 속 존재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티켓을 내밀던 미소와 따뜻한 말투는 이제 다소 섬찟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덕분에 보기만 해도 소년의 감수성을 다시 데려와주는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을 제 때 볼 수 있었지 않은가?




한 번은 이등병에서 일병으로 진급을 한지 얼마 안 되어 일병휴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어느 겨울이었다. 모처럼 크리스마스에 일병휴가 날짜가 맞춰졌다는 행정반의 통보를 받은 나는 기분 좋게 근무 교대 준비를 하며 탄띠와 헬멧 그리고 총을 챙겨 초소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같이 근무를 서게 된 선임이 마침 군생활 못하기로 유명한 상병이었는데 말 그대로 짬밥만 많았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던 전형적인 고문관이었다. 그런데 또 후임들 앞에서 항상 으스대는 모습으로 선임 대우를 받으려고 하니 부대의 미움을 한 몸에 받는 그런 존재이기도 했다.


나는 초소에 들어가 적당히 그의 기분을 맞춰주며 어서 근무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병은 한참 후임인 나를 놀리고 싶었는지 또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야 니 총검술 동작 다 할 줄 아나?"


"어려워서 완벽하게 할 줄은 모릅니다!"


"야 그라믄 니 이거 못하것네?"


상병은 또 으스대려는 기질이 발동했는지 경계총자세를 풀고 어설프게 총을 흔들며 당치도 않은 총검술 자세를 취한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내심 칭찬을 기다리는 눈초리를 보냈다.


"와 잘하십니다. 저는 처음 보는 동작입니다!"


"그라믄 니 이것도 모르나?"


상병이 좁디좁은 초소 안에서 재차 가당찮은 동작을 취하려는 순간.


"탕!!"


장전되어 있던 공포탄이 발사되고 말았다.


상병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얼어붙었고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부대에서는 공포탄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무도 와보지 않았고 상병은 바닥에 떨어진 탄피를 슬쩍 줍더니 탄창 맨 아래에 욱여넣으며 비밀을 당부한다.


"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하지만 며칠 못 가 탄피 점검을 하던 행정반에서 공포탄이 발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대로 상병은 군기교육대로 끌려갔으며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가 휴가를 보내고 있었어야 할 나는 연대책임으로 휴가를 박탈당하고 완전군장 차림으로 얼차려를 받게 되었다.




그 이외에도 자정부터 아침까지 시끄럽게 파티를 하는 이웃 때문에 잠을 못 이뤄 컨디션이 엉망인 성탄절 당일을 보내는 등등 크리스마스는 내게 달갑지만은 않은 기억들이 자리하고 있다.


비록 이런 나이지만.


여러분?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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