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오늘은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단 말이야!"
작은 아이가 침대 위에 올라가서 잠들어 있는 남자를 초조한 목소리로 흔들어 깨우고 있다. 달갑지 않은 재촉에 남자는 이미 잠에서 깨버렸지만 여전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한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그만 일어나!"
이제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어도 다시 잠이 올리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남자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바라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오전의 어슴푸레한 햇살이 시계판 위로 비스듬히 걸쳐있다. 남자는 시계를 보고는 숨을 깊게 한번 들이쉰다.
"아직 일어날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이나 남았다고..."
"그리고 넌 언제 철들래? 나쁜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아."
마지못한 남자는 투덜대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수건을 챙겨 들고 욕실의 세면대로 향한다. 아이는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간다.
"여기까지 따라 올 필요는 없잖니? 난 괜찮으니까 저쪽으로 좀 가있지 않을래?"
"그래도 난 미리 알려주고 싶어. 그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걸..."
간신히 아이를 달래 욕실 밖으로 밀어낸 남자는 수도꼭지를 열고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에 왼손 약지의 첫마디를 가져다 대며 보일러가 어서 온수를 내오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울 속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 정도밖에는 없다.
아직은 잠결에 살짝은 부은듯한 얼굴과 눈가의 눈곱 그리고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 나와 눈을 마주친다. 매일 아침 마주하는 탓에 질리면서도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얼굴을 힘껏 일그러뜨려 보기도 하고 반대로 안면 근육을 주욱 펴보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얼뜨기 같은 얼굴 표정에서 헛웃음이 나올 때쯤 망을 보고 있던 왼손의 약지가 흐르는 물의 미세한 온도변화를 감지한다.
얼른 컵을 들어 너무 뜨거운 물이 나오기 전에 미지근한 물을 컵에 담고 양치를 시작한다. 방금 일어난 참이라 이 사이에 음식물이 끼어있을 리는 없다는 생각에 조금은 무성의한 칫솔 머리가 치아들의 표면을 빠르게 완주해 내고 마침내 혓바닥 위에 오른다.
양치의 완성은 바로 혀를 닦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철학을 가진 그는 하나의 미뢰도 간과하지 않을 심산으로 혀를 문질러가며 점점 목구멍 깊숙이 칫솔 머리를 밀어 넣는다. 그렇게 두어 번의 헛구역질을 했을 때쯤 입안이 개운해지면서 남아 있던 잠이 달아났다.
세안과 면도까지 마친 그가 타올로 얼굴을 두드리듯 닦으며 욕실 밖으로 나오자 역시나 욕실 문 앞에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 달처럼 하얗고 탐스러운 얼굴, 송이버섯갓을 씌워놓은 듯 동그랗게 손질된 까맣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의 남자아이는 한 손에 오토바이 장난감을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본다.
남자는 수건을 다시 걸어놓으려다 말고 왠지 측은해 보이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다. 혹은 남자의 어딘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그렇게 보이도록 그의 시야를 착색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날 이렇게 일찍 깨운 이유는?"
남자가 정수기로부터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반정도 채우며 차분하게 입을 뗀다.
"나 그냥 무서웠어. 또 그때처럼 아프고 싶진 않단 말이야."
아이는 왼쪽 가슴팍을 주무르며 볼멘소리를 한다.
녀석이 내 앞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건 몇 해 전의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 왼쪽 가슴팍의 큰 상처와 함께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었다. 여러 병원의 신세를 지면서도 녀석은 끝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제대로 말을 해주지 않았고 만났던 의사들도 하나같이 어쩌다 생긴 상처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처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좋아졌고 지금은 부드러운 살결 위에 도톰하게 흉터가 남았지만 언젠가는 이 흉터 또한 희미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음악이라도 좀 들려줄까?"
남자는 책장에서 낡고 금이 간 케이스를 열어 CD를 꺼낸다. 그리고 그것을 플레이어의 트레이 위에 올려놓고 재생버튼을 누른다. 건조한 플라스틱의 마찰음과 함께 CD를 삼킨 플레이어는 침묵하고 있던 스피커를 깨우고 방안은 스매싱 펌킨스의 <1979>이 흐르기 시작한다.
<1979>의 도입부가 몇 초간 흘렀을 때 남자는 역시 아이에게 들려주고 공감을 살만한 곡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는지 남자는 볼륨을 조금 줄인다. 그리고 얼버무리기 좋은 그럴싸한 말을 생각해 내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음... 이곡은 너처럼 때를 잘못 만난 멋진 녀석들에 관한 노래야."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너는 여전히 멋진 녀석이라는 것도 잊지 말았으면 해."
그러고는 남자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려 방 한쪽 귀퉁이 벽에 내려놓고는 아이의 정수리 높이에 맞춰 벽지에 연필로 선을 그어 표시를 한다. 방금 그어놓은 선으로부터 손톱만큼 아래 몇 개월 전인가 그어두었던 조금은 뿌옇게 번진 또 다른 선 한 줄이 보인다.
"너 그래도 조금은 자랐구나?"
"많이 자라진 않았지만 괜찮아 조금만큼이라도 자랐다는 게 중요하니까, 언젠가는 나보다도 더 크게 자라는 모습을 꼭 보고 말 거야."
<1979>의 후렴구가 나올 때쯤 남자는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한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스파게티라도 먹을까?"
"응."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는지 그려 넣은 듯 가지런한 까만 눈썹과 동그란 갈색 눈동자에 힘을 주며 아이는 끄덕였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물이 담긴 냄비를 올린다. 그리고 주방 후드까지 켜자 이제 음악소리는 들리는 둥 마는 둥 멀어진다. 스파게티면을 계량하던 남자는 순간 아차하는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서둘러 주방 수납장을 열어본다. 그리고 팔을 깊숙이 넣어 뒤적이더니 토마토소스병을 하나 발견해 내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다행히 소스가 하나 남아있었군. 소비기한이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뭐 괜찮겠지."
그는 그저 면에 소스만 버무려내는 것이 미안했는지 면이 익는 동안 양파와 새송이 버섯을 잘게 썰어 함께 볶을 준비를 한다. 어린 입맛을 달래줄 슬라이스 치즈도 두 장 얹어줄 생각으로 냉장고에서 미리 꺼내 상온에 맞대 놓고는 아이를 힐끔 바라본다.
"그나저나 넌 언제까지 이럴래? 좀 더 대범해지지 않으면 멋진 어른이 될 수 없다고."
"몰라! 난 어른 안될 거야! 이렇게 있을 거야!"
아이는 침대 위에 올라가 펄쩍펄쩍 뛰는 시늉을 하며 양팔을 휘젓는다.
괜한 말을 꺼냈다 싶은 남자는 화제를 돌린다.
"이거 먹고 공원에 바람이나 쐬러 갈까? 좋지?"
"응! 그건 할 거야!"
스파게티가 완성되고 가스와 후드를 껐지만 음악소리가 다시 들려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고독한 연주를 마지막까지 끝내고 멈춰 선 모양이다. 조용히 식사를 하기엔 차라리 잘 된 것 일런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겨울의 햇살 아래 남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강이 흐르는 공원의 산책로를 걷고 있다. 하늘로부터 수직낙하한 빛의 기둥이 수면에 부딪히고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눈부시게 찬란한 파편을 흩뿌리며 일렁인다. 그렇게 마치 한낮에 반짝이는 별들을 가득 품은 역설적인 하늘 같은 강변에 멈춰 선 남자는 시시한 이야기를 꺼낸다.
"오래전 내가 너만 했을 때 바로 여기서 수족관에서 사 온 거북이를 놔준 적이 있었어."
"그냥 멀리서 강에 던져 넣어도 될 것을 소중히 보내준답시고 강가에 바싹 다가갔다가 이끼에
미끄러져 흠뻑 젖은 날이기도 했지. 다행히 깊이 빠지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젖은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엄마한테 혼날까 봐 무서웠었지."
아이는 가만히 강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거북이는 고마워했을 거야. 거북이는 엄~청 오래 산댔어."
"언젠가 만나러 여기에 다시 나타날까?"
남자는 그야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이야기를 희망적으로 마무리해 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쎄... 그럴지도?"
라고 대답하며 남자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옆에 있던 시소에 앉힌다 그러고는 반대쪽으로 가서는 엉거주춤한 자세와 함께 시소 손잡이를 잡는다.
땅에 닿은 남자의 다리가 굽혔다 펴졌다 할 때마다 맞은편에 앉은 아이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산다는 건 말이야. 언제나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야."
"기뻐서 솟아오를 때도 있지만 슬퍼서 가라앉을 때도 있지"
"나는 네가 그 어느 한쪽에만 빠져있지 않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이렇게 올려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어떡해?"
아이는 걱정과 호기심이 섞인 목소리로 눈썹을 치켜들고 묻는다.
"바보야 그럴 땐 네 두 다리로 직접 힘 껏 땅을 박차고 오르면 되지!"
서로 오르내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강가에 흐르던 빛의 파편에 닿아 점점 이지러져 희미해진다.
현실인 듯 비현실인 듯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그 풍경은 오후의 끄트머리를 따라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는 남루한 시소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