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blo Picasso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Les Demoiselles d'Avignon
Paris, June-July 1907
243.9 x 233.7 cm
모마 MoMA는 1937년 자크 셀리그만 앤 코 Jacques Seligman & Co. 로부터 그때 당시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 작품을 모마의 초대 디렉터인 알프레드 바 Alfred Barr의 설득으로 $24,000(약 3,000만 원)에 구매한다. 이 비용은 모마가 가지고 있던 드가 Edgar Degas의 한 작품을 팔아 $18,000을 모으고, 나머지 비용은 기부로 채워 구매자금에 보탠다(The co-owners of the gallery Germain Seligman and Cesar de Hauke). 1939년 모마가 지금의 위치에 새로운 미술관을 지어 리 오픈하면서 이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사실 피카소 자신은 이 작품이 루브르에 걸리길 바랬다.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20세기 최고의 화가, 스페인이 낳은 세계 최고의 화가, 큐비즘 Cubism(입체주의)의 대가, 이 시대 최고의 위대한 천재 화가 등 정말 많은 수식어가 붙는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이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최고의 찬사가 ‘피카소, 피카소 아냐?’라고 할 만큼 최고 화가의 대명사로 쓰이는 이름이기도 이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고, 또한 이 세상에 보여지지 않았던 새로운 미술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던 피카소는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대가로 손꼽히게 된다.
레 드모아젤 다비뇽 Les Demoiselles d'Avignon,
우리말로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작품명이다. 그런데, 이 작품명은 원래 피카소가 지은 작품명이 아니라, 첫 전시회를 관리했던 비평가 앙드레 살몽 Andre Salmon이 사회적 반향을 줄이기 위해 살짝 다운시킨, 바꾼 작품명이다. 그럼, 원래 피카소가 지었던 작품명은 그럼 뭘까? 르 보르델 다비뇽 Le Bordel d'Avignon, ‘아비뇽의 창녀들’이다. 와- 쎄다. 작품도 모두 벗고 있는 누드 모습이고, 작품명 또한 ‘아비뇽의 창녀들’ 이라니,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작품과 작품명, 모두 쎈 것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 이라고 작품명이 바뀐 이후에도, 정작 자신은 ‘아비뇽의 창녀들’로 작품명을 계속 부르곤 했다.
아비뇽 Avignon,
구글 맵에서 아비뇽을 검색하면 프랑스의 아비뇽이 먼저 나온다. 프랑스의 아비뇽이 여행지로 많이 알려져 있어 이 곳의 여인들을 피카소가 그린걸로 알고 있기도 하는데, 스페인 화가인 피카소가 얘기하는 아비뇽은 피카소 어머니의 고향으로 이전에 살았던 스페인의 아비뇽을 말한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곳이다 보니 선원 Sailor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고, 그 선원들을 대상으로 성을 파는 골목 아비뇽을 말한다.
Paris, June-July 1907,
1907년 파리에서 약 6개월을 걸쳐 그의 나이 25살 때 이 대작을 완성하였으나, 일반인들에게 공개는 약 9년이나 더 뒤인 1916년 전시회 (Salon d'Antin)이다. 약 9년 동안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피카소의 작업실 스튜디오에 머물러 있게 된다. 왜 일까? 왜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린 후, 바로 공개하지 못하고 9년 후에나 오픈한 걸까?
This 2008 oil on canvas painting by Damian Elwes, "Picasso's Studio at the Bateau Lavoir," depicts the artist's studio in about 1907, when he was painting and privately showing his epochal painting, "Demoiselles dAvignon"
243.9 x 233.7 cm,
이 작품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렇게 큰 사이즈의 작품인지 전혀 예상을 못했다. 2 m 가 넘는 큰 작품이다. 이렇게 큰 작품이었다니, 왜 나에게 아무도 이렇게 큰 작품이라는 걸 얘기 안 해 준 걸까? 보통의 미술책에서는 작품만 나오기에, 전혀 의심도 없이 일반적인 작품 사이즈겠거니, 생각했다. 세로가 약 2.5 m 정도이니 그림 속의 모델 Models 이 실제 우리보다 더 크다. 압도적이다. 큰 작품 앞에 서면, 느껴지는 감정이 두 가지라고 한다. 첫 번째, 압도감이다. 큰 그림 앞에서 우리는 작아진다. 큰 그림의 힘에서 압도를 당한다. 그 다음으로 오는 두 번째 감정이 경외감이라고 한다. 뭔가 있겠지, 뭔가 대단한 게 있겠지, 존경심 Respect 이 나온다고 한다. 이 그림 앞에서 느꼈던 두 가지 감정, 압도감과 경외감, 정확이다.
1907년 작품 완성 후 가까운 친구들에게 첫 오픈,
‘내가 이번에 대작을 하나 완성했어. 내 작품 한 번 보러 오지 않을래?’
그렇게 모인 친구들의 반응은 최악이다. 너무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이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은, 모멸감이라고 말한다.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 작품이라고 까지 얘기한다. 피카소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이러한 반응에 깜짝 놀란다. 서로 놀란다. 왜일까? 왜 친구들은 이러한 반응을 보였던 걸까? 무엇 때문에?
그림 속 모델들의 시선,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자와 마주치는 그 시선! 그 시선에서 오는 당혹감이다. 보통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 속 세계와 관람자 사이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제4의 벽’ 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 벽 때문에 우리가 안정감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이다. 공연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무대 위 공간과 관람자석 공간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지만, 서로 다른 세계라는 동의가 있다. 이 또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제4의 벽’이 있어서 우리가 안정감을 가지고 공연을 관람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 ‘제4의 벽’이 작품 속 모델들의 시선 때문에 여실 없이 깨져 버린다. 그 시선이 작품 속 인물들에게 서로 머물지 않고, 작품을 뚫고 나와 작품 밖에서 감상하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거기에 또한 눈 마주친 사람들이 세속적으로 밑바닥 일을 하고 있는 ‘성을 파는 여인들’이다. 더불어, 부끄럽게도 옷도 다 벗고 있다. 거기서 오는 모멸감이다.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 감정이라고 까지 말한다.
이 생각지 못한 반응에 대한 충격으로 피카소는 이 작품을 자신의 스튜디오에 쳐 박아 두고, 공개하지 못하다가 일반인에게 오픈하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전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림 밖 관람자와 눈맞춤으로 인한 당혹감과 모멸감을 주는 효과는, 그전 마네 Édouard Manet의 ‘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 작품에서도 똑같은 발휘되게 된다.
부르주아 Bourgeois들과 풀밭 위에서 점심 식사하는 모습인데, 한 여인이 벌거벗고 있다. 옆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게끔 도구들이 흩트러져 있다. 성을 파는 여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여인의 시선이 관람자와 눈을 마주친다. 입가에 비웃음까지 살짝 띄고 있는 듯하다. 불쾌스럽다. 이 작품 또한 당대에 많은 비난을 받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비난을 하고, 작품에 손상을 가할 까봐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작품이 걸리기도 한다. 살롱전에서 받아들어지지 않고 낙선한 작품들만 모아 전시한 전시회(Salon des Refusés)에서 걸리게 된다. 이 작품으로도 충분히 마네가 욕을 많이 먹었을 듯싶은데, 6개월 후에 더 파격적인 작품을 한 번 더 그린다.
‘올랭피아 Olympia’이다. 이번엔 몸 파는 여인이 아예 주인공이다. 올랭피아 라는 이름은 그림속 여인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성을 파는 여인들이 많이 쓰던 이름이었다고 한다. 작품 한가운데에서 옷을 벗고 누워 있다. 오른쪽에 하녀는 꽃을 들고 있는데, 이 꽃은 딩동! 문 밖에 남자 고객이 도착했다는 걸 알리는, 그가 들고 온 꽃이다. 이전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등장했던 모델과 같은 모델(Victorine Meurent)인데, 더 당돌한 표정이다. 여기서도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우리를 비웃는 듯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작품 또한 그 시대에 참 많은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다.
피카소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피카소가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메시지를 주고자 그린 것 아닐 텐데, 그럼 무엇일까? 그 메시지의 힌트로서, 작품 중앙 밑에 놓여 있는 과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일 Fruits, 너무나 달콤하고 맛있는 과일이다. 과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너무나 달콤한 과일이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달콤함은 언제였는지, 바로 썩어 버린다. 썩어버리고 부패해 버린다. 너무나 짧은 달콤함이다. 우리의 짧은 인간 욕망과 닮았다. 그 짧은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이 곳, 성을 파는 골목까지 온 사람들인 것이다. 너무나 짧은 ‘‘인간 욕망의 덧없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프리카 가면,
작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왼쪽의 두 여인이 쓰고 있는 아프리카 가면 African Masks이다. 그때 당시에 아프리카 미술이 유럽에 처음 소개되면서 많은 화가들이 아프리카 미술에 빠진다. 피카소에게 아프리카 미술을 소개해 줬던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 원시미술이 좋아 타히티로 직접 날아가 살면서 그림을 그렸던 폴 고갱 Paul Gauguin 등이 있다. 피카소도 아프리카 미술에 흠뻑 빠진다.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술로, 원시미술, 강렬한 보색 대비 색채 등을 보여주는 미술이다.
피카소 자신이 이전에 보여지지 않았던 새로운 미술을 선 보이고자 했던 강한 메시지로 ‘아프리카 가면’를 작품 속에서 표현했고, 또한 작품 속의 여인들이 모두 옷을 벗고 있지만 유일하게 입고 있는 옷 아프리카 마스크이다. 영어식 표현으로, ‘Wear a mask’라고 표현하는 옷이 마스크인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고 감추기 위해 쓰는 가면, 광대, 삐에로, 조커 Joker 의 가면, 세속적으로 밑바닥 일을 하고 있는 이 여인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 가면, 마스크이다.
원근감 Perspective의 파괴,
그 당시 보통 클래식한 그림이라고 하면, 원근감이 크게 들어가 있든, 적게 들어가 있든, 어느 정도 표현이 되어 있어야 잘 그린 그림이라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파격적으로 원근감을 아예 없어 버렸다. 평면적인 느낌으로 그렸다. 공간의 느낌이 전혀 없는 2차원적인 그림이다. 모델들 또한 종이인형처럼 평면적으로 표현했다. 이 원근감의 파괴 때문에 이 그림을 ‘20세기 현대 미술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이다. 이전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작품이다.
피카소는 이 원근감의 파괴를 폴 세잔 Paul Cézanne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그리게 된다.
피카소는 폴 세잔을 가리켜 ‘우리 모두의 아버지 The father of us all’ 이자 ‘나의 유일한 스승 ‘My one and only master!’라고 칭한다. 피카소가 폴 세잔을 얼마나 대단하게 보는지, 얼마나 존경하는지 여실히 들어내는 말이다.
폴 세잔, 역시 천재적인 화가이다. 파리에서 인상주의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다, 자신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고 그림 잘 그린다는 평을 얻지 못하자, 다 때려치우고 자신의 고향인 엑상프로방스 Aix-en-Provence로 내려와 혼자 처박혀 몇 년 동안 엄청난 그림 연구에 몰입한다.
‘파리 Paris의 친구들이 그리는 인상주의 그림들은, 빛 Light 을 쫓아 겉모습의 변화만 표현하는데 너무 집착하는, 너무 가벼운 그림들을 그리고 있어! 나는 그런 겉치레 가벼운 그림 말고, 모든 사물의 다양한 겉모습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면의 단단한 본질 Nature을 그릴 거야!’
‘본질 탐구 그림’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 고민의 결과로, 단순하고, 도형적이고, 원근감이 없어진 그림에 도달한다. 이 부분에 피카소가 영감을 얻는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구, 삼각뿔, 원통형의 형태에서 온다.
- 폴 세잔 Paul Cézanne -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큐비즘 Cubism, 입체주의의 시작이다!
큐비즘 Cubism의 시작,
사실, 큐비즘(입체주의)의 기본 개념을 세우고 처음 선을 보인 화가는 세잔이고, 그것을 꽃을 피운게 피카소이다.
모마의 초대 디렉터 였던 알프레드 바 Alfred H. Barr. Jr. 가 정리한 현대미술의 계보에 관한 스케치.
폴 세잔의 본질 추구 그림이, 형태적 본질인 큐비즘의 대가 파블로 피카소에게, 컬러의 본질인 야수주의의 대가 앙리 마티스에게 모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델들의 모습이 삐뚤빼뚤 각진 모습의 큐비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또한 폴 세잔의 ‘본질 탐구 그림’의 영감으로 피카소가 표현한 여인들의 모습이다.
‘한 여인의 본질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각도에서 보여지는 모습만으로는 그 여인의 본질을 표현하는데 너무 부족해, 한계가 있어. 다양한, 여러 각도에서 보여지는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낸 그 모습, 그 모습이 저 여인의 진정한 본질이야!’
그렇게 다섯 여인을 완성한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모습을 하나의 화폭에 담아내는 것, 그게 바로 큐비즘인 것이다.
초반 스케치 Sketch 속 두 남자,
대작을 완성하기 위한 피카소의 6개월 동안의 노력은 참 많은 스케치와 연구의 흔적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독 눈에 띄는 스케치는, 초반의 스케치에 남자 둘을 포함한 모델 7명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남자 둘을 뺀 여성 다섯 명으로만 완성한다. 아하, 그래서 왼쪽에 서 있는 여성의 자리가 원래 남성의 자리여서, 여성의 골격이 남성스럽게 흔적으로 남아 있는 거구나!
그럼, 두 남자는 누구일까?
왼쪽 남자는 책을 들고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스케치에서는 해골을 들고 있기도 한다. 책과 해골을 들고 있는 남자, 의과 대학생 A Medical Student이다. 왜 뜬금 없이 해골을? 인간 욕망의 달콤함 바로 뒤에 오는 죽음,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넣어 주고자 했다. 그림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또 다른 남자는 이 성 性 을 파는 골목에 자주 오는 단골 고객, 선원 A Sailor이다. 지금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럼, 두 남자는 어디로?
두 남자가 그림 안에 있을 때는, 주위 여인들의 시선이 두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두 남자가 그림에서 빠지면서 여인들의 시선이 그림 밖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두 남자, 그림 밖으로 나와 우리가 그 두 남자가 된다. 그림 속 여인들이 쳐다보고 있는 우리, 우리가 두 남자이다. 달콤한 인간 욕망을 쫓아 살아가는 우리가 두 남자가 되는 것이다. 피카소, 두 남자를 빼내고 우리를 두 남자로 남기면서 작품에 신의 한 수를 두게 된다. 대단하다. 천재 피카소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시작 The beginning of Modern Art,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20세기 현대미술이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전 클래식한 작품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파격적인 시도들이 많이 보이는 혁신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가만히 감상하면서, 작품 속 여인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눈 마주침을 피하지 말고,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도 마냥 욕망만 쫒아 가고 있지 않다고, 변명이나마 그들에게 뭔가를 얘기해 보자.
난 12살때부터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렸다.
라파엘로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단 4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아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이 걸렸다.
나는 평생 아이처럼 그리고 싶었다.
-Pablo Picasso 파블로 피카소-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잔혹함’을 넘어 ‘전쟁의 잔혹함’ 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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