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탔는데 13층 입주민과 20층 입주민이 오랜만에 만난 모양이었다. “아이고, 여전하시네.”, “아이고, 사장님이 더 여전하시지요.” 두 사람은 ‘세월이 지나도 나이 든 느낌 없이 건강하시네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럴 때 여전하다는 말은 칭찬이 된다. 어느 대학생이 4학년이 되어도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면 부모는 자식에게 “너는 여전하구나.”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여전하다는 말은 부드러운 욕이 된다. 누가 나에게 근황을 물어볼 때마다 나는 늘 ‘여전하다’고 답한다. ‘잘 지낸다’는 뜻으로. 어쩌면 그 말 대로 전과 다름없이, 가만히, 나아가지 못하고, 조용히 잘 지낸다. 누가 지금의 나를 엿본다면 편하게 산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알람 없이 자고, 점심 즈음에 일어나, 도서관 가거나, 카페 가거나, 바다에 간다. 실업급여 176만 원 입금 문자가 찍힌다. 놀면서 돈 받으니 좋겠다고? 놉.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몇 달 후에는 수입이 0 이 되는 상황이 온다. 수입이 0 이 된다고 해서 당장 생계가 곤란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신이 곤란해진다. 텅 비어 흘러가는 배는 작은 흔들림에도 뒤집히는 법이니까. 취업사이트에 자주 들어가 본다. 한 명 뽑는데 지원자가 백 명에 육박하다는 걸 알게 된 희망이 도망간다. 내가 다시 회사라는 조직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자신이 없는 건지 각오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명줄이 이끄는 대로 어떻게든 먹고 살 거라는 낙관과 가시덤불 우거진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비관이 머릿속에서 교차한다. 안 좋은 생각이 들 때마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린다. 공원을 걷는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미래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그런 일상일 뿐이다. 시험에 합격하거나, 훈련이라도 받아야 돈 벌 가능성이 생긴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주저하게 된다. 다양한 이유로 겁이 난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조차 하지 않는 나약한 어른이 여기 있다.
동네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창 밖을 바라본다. 10년 전에도 이 자리에서 책을 읽다가 창 밖을 보곤 했다. 당시에는 막연히 현재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 좋은 곳에 가 있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더 좋은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을 원했다.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몇 번의 이직과 전직을 거쳐 다시 여기에 있다.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에 온 기분을 말하자면 공중제비의 고수가 된 느낌이다. 아무리 돌아도 제자리에 착지하는 공중제비처럼 ‘네 자리는 여기다’라고 누가 정해 놓은 것처럼. ‘사실,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거짓말,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거야.’ 고요한 마음의 소리는 진실과 대면한다. 머물 곳 없는 눈이 허공에서 방황한다. 자기만의 생生이 열리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다는 말, 도저히 위안이 되지 않아서 겨우 살고 있는 겨울, 여름이지만 여전히 겨울, 겨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결과를 확인한다. 역시나 아니다. 덜컹거리는 숨을 가다듬고 후우 불면 잠시나마 올라가는 기분이 된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탁 트여 있는데 멈춰 있는 구급차의 비상 깜빡이가 요란하다. 미래가 축 늘어져 실려가는 모습. 가질 수 없는 욕망이었나. 대단한 걸 원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새벽이 다가온다고 말해주던 친절도 기다리다 지쳐서 떠나간다. 좁은 문이 있던 자리는 이제 폐허로 변해서 할 수 있는 건 다른 문을 찾아 두드리는 것뿐. 저 좀 받아주시겠습니까. 하얀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등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