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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아 Aug 01. 2024

빈 바구니 채우기

사장이 그만두라고 말한 후, 나는 곧바로 알겠다고 했고, 퇴사일은 5일 후로 합의했다. 권고사직. 잘렸는데도 타격이 없는 건, 그 회사를 언젠가는 그만둘 회사로 마음속에서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번 달까지 할 수도, 올해까지만 다닐 수도 있는 회사라면 오늘 잘린다고 해도 억울할 건 없다. 난 그만두라는 말에 동요가 없었고 태연했는데, 그 점이 사장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너는 왜 멀쩡하냐는 말을 들었다. 내가 자르지 말아 달라고 울고불고 안 해서 괘씸한 건가. 앞으로 볼 일 없는 사이에 깔끔하게 오케이 하고 꺼져주는 건데 사장 입장에서도 좋은 거 아닌가. 



퇴사하면 하루는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내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는 시간은 반가우면서도 두려웠다. 스멀스멀 우울이 들어올까 봐 일부러 돈을 과하게 써댔다. 차부터 샀다. 인생 첫 차였다. 차가 생기면 정신없을 거라는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한 달 정도는 길 익힐 겸 여기저기 쏘다녔기 때문에 시간이 후루룩 흘러갔다.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길 위에서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시들해졌다.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십 년 가까이 책을 멀리했는데 다시 집어 든 것이다. 십 수년 전 현실도피로 책을 선택했던 적이 있다. 꼬박 3년을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책에 파묻힌 시절이었다. 당시 읽은 책이 수천 권은 될 텐데, 그렇게 많이 읽고도 나아짐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내 탓이라는 걸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구원받지 못하고 허송세월했다는 억울함에 사로잡힌 기간이 너무 길었다. 



책 읽는 순간의 찬란함이 책 읽은 후에도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이번에는 글도 쓰기로 했다. 글을 쓰는 동안 세상에 글과 나만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나는 글 속에서 태어나고, 글은 나를 이용해서 태어난다. 무용無用함을 잊는다. 잡념이 사라진다. 영혼이 맑아진다. 마음이 얼음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고, 소소해도 시시하지 않다고 말해준다. 등을 쓸어주면서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다독여준다. 



영화는 보면 좋고, 안 봐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흥미를 가지기로 했다. 넷플릭스에 가입해서 <헤어질 결심>을 봤다. 여운이 길게 남았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다. 어떤 분이 감상을 적다가 자신은 한국 영화를 볼 때 영어 자막을 켜 놓는다고 했다. 번역된 영어 대사가 궁금하다며. 상상도 못 한 감상법이었다. 영어 실력을 늘리고 싶으나 게으르고 핑계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게 맞을 것 같았다. 영어 자막을 켜 놓고 다시 영화를 봤다. 두 배로 즐거웠다. 



바구니는 다양하게 채워진다. 나는 오늘도 함께 담을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 다음에는 무엇이 될지 모른다. 아마도 운동? 어쩌면 모임? 새로운 공부? 뭐라도 좋다. 반짝거리는 눈이 지구를 한 바퀴 돈다. 그 무엇은 만지고 싶은 온도로 온다. 그 무엇은 눈동자에 맺힌 시간을 부드럽게 흔든다. 그 무엇은 가느다란 햇살을 두 손에 쥐고 머문다. 그 무엇은 나를 열고 들여다본다. 그 무엇은 내 편이 된다. 바구니는 천천히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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