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타고
엄마보다 자식 생각
오도독오도독 추억 씹는 소리 반갑다. 딸을 출가시킨 오래된 친구가 혼자 있기 심심할 때 소일거리로 자주 만들어 먹는다던 누룽지를 가난했던 시절이 그립다며 내게도 한 봉지 넉넉히 건네준다. 찐쌀 생각하며 먹으라고. 정답다, 두터운 우정처럼 누룽지도 두텁다.
보릿고개 시절 엄마는 덜 여문 벼를 쪄서 찧은 찐쌀을 종지에 담아 씹어먹으라고 주셨다. 입안에 한 모금 훑어 넣고 씹으면 하얀 단물이 주르릅 흘러나와 목젖으로 넘어갔다. 오래 씹을수록 단맛도 났지만 다 먹고 나면 더 먹을 게 없어서 아주 오래오래 씹었었다. 조그만 종지에 한 사발씩 퍼담아 주시고는 아껴먹으라는 말은 당신도 차마 못 하셨다. 씹고 씹은 세월만큼 가난의 더께가 너무 깊었다. 가난의 더께를 얼마큼 벗겨냈을 때 엄마는 이 상한다 한사코 누룽지를 거절하셨다. 신줏단지 모시듯 검은 봉지에 꼭꼭 숨겨 놓으시고는 옆으로 돌아누워 연속극 보고 계시다가 불쑥 찾아간 딸내미 무안하지 않게 흰 이를 드러내며 웃으셨다. 속내를 들켜버렸다. 한사코 찐쌀이 아니라고 우기시더니 한 마디 하셨다. "고구마다, 고구마". 찐쌀이든 누룽지든 생고구마든 이 상하고 이상한 소리 듣기 싫어 손사래 치며 거부하시더니 무슨 요량으로 숨기듯 누룽지를 드셨을까. 그게 무엇이든 앉아서나 드시지. 삶이 편안해져도 먹여 살려야 할 장정들을 감당해 내기엔 여린 체구에도 살짝 옆으로 돌아누운 당신의 삶도 솥단지에 눌어붙듯 아직은 고되었다.
누룽지가 솥단지 안에서 보글보글 헤엄치고 있다. 숟가락으로 살살 긁어주면 등이 좀 시원하다 그렇게 지난했던 삶도 녹여내고 있다. 몽글몽글 끓어오르는 구수함이 삶의 풍요로움을 말해 준다. 없으면 굳이 찾지 않아도 되고 있으면 맛있겠다 감탄하는 간식이 되었으니 그로 인해 식탁도 충분히 풍성해진다. 끓인 누룽지를 곁에 두고 김치 하나를 담아 내놓으니 멋스러운 삶이 되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실려 온 친구의 구수한 향기가 온 집안 가득 온기로 남는다. 엄마 손길 닿은 곳에도 향기는 앉았다. 엄마는 풍요의 삶을 얼마나 누리고 가셨을까.
살아내기 버거웠을 때 그때도 엄마는 누룽지를 좋아하셨던 걸까 잠시 생각에 젖어들었다.
서울살이 하는 자식이 쉬는 날이라 내려온다니 잠시 분주했다. 명절에도 만나기가 어려워 언제라도 내려온다면 두 손 들고 환영이다. 고깃집에 가서 갈비를 사야겠구나, 반가운 마음에 덧붙여 파전을 부치고 잡채를 버무렸다. 기뻐 흡족해하던 그날 저녁 급한 일이 생겨 내려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또 받는다. 보고 싶던 마음이 더 간절해지면서도 한편으론 애써 엷은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차라리 다음에 만나는 걸 기약하자, 엄마로서의 그것도 때론 사랑이라 치부한다. 엄마의 잔소리거리를 조금 줄여주는 일이라 여기기에,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이기에 웃고 넘긴다. 삼시 세끼 제시간에 챙겨 먹여야 한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자식을 대하는 사랑은 아니었다. 밖에 나가면 충분히 좋은 음식을 먹는다지만 때론 안쓰러운 마음에 엄마 집을 찾은 녀석에게 따뜻한 밥 한 끼 해 먹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리할 수 없어 슬쩍 아쉬웠다. 그러나 아이는 배가 고프면 언제라도 먹는다. 엄마가 챙겨주지 않아도 잘 먹고 다니고 굳이 먹는 시간을 엄수하진 않는다는 것을 엄마인 나는 서울살이 1년을 보낸 후에야 터득하고 말았다.
아들을 생각하며 만든 잡채는 누룽지 같은 편안한 간식이 되어 냉장 자리 한편을 차지했고 파전은 신이 나서 막걸리를 부르고 있다. 그리운 마음을 접고 술자리를 폈다. 술잔에 어린 자식 얼굴이 또르르 소용돌이 속에 휘감겨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막걸리 한 잔에 목이 멘다. 자식 기다리는 어미 마음이 이리도 아릴까. 일 년에 겨우 몇 번 가슴 벌려 맞이하는 엄마의 붉은 마음이 오히려 애달프다. 어쩌다 보는 얼굴이 꽃으로 다가오고 또 언제 볼까 기다려지고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는지 걱정도 되는데 술기운은 따뜻하게 돈다. 엄마가 걱정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저는 저대로 잘 지낼 것이고 눈 내리고 비 내리는 건 엄마도 어찌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갈비를 해 놓을까 자식을 걱정하던 사이 타향살이 하던 자식을 기다렸던 엄마 생각에 누룽지가 또 밟힌다. 우리 엄마도 시집간 딸이 친정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랬을까. 명절 때도 자주 올 수 없었던 딸자식을 때론 눈물로 기다리셨겠지. 밥상머리 앞에서 따뜻한 국물이 차가워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셨겠지. 저녁 늦게 오는 줄 알면서도 새벽부터 맞을 준비 하셨겠지. 인생을 사는 어중간한 나이의 나는 누룽지를 생각하다 또 갈비를 생각한다. 엄마를 그리다가 아들을 떠올리며 누룽지가 무슨 맛이 있었을까, 차라리 갈비가 낫지. 엄마인 나는 엄마보다 자식이 먼저였다. 엄마도 자식이 먼저였을 거야, 그래서 엄마는 누룽지 오도독오도독 씹으시며 행여 먼 길 달려올까 아픈 손가락들을 헤아리고 계셨겠지. 텔레비전을 보셨지만 본 게 아니었을 게지. 자식들이 올까 엄마는 당신의 기다리는 마음 들키지 않게 누룽지를 씹고 계셨던 것이다. 지나는 발소리를 놓칠세라 연신 창밖을 바라보며 TV소리로 위안 삼으셨으리라. 몽글몽글 끓이는 누룽지 맛도 좋지만 오도독오도독 누룽지 씹는 맛도 정답다. 이 상한단 엄마 잔소리가 괜한 억지는 아니었구나 싶다. 씹는 것보다 냄비를 먼저 찾는 것이 꼭 늙은 엄마를 닮았다. 누룽지 한편 내 가슴엔 젊고 이쁜 엄마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아들 녀석이 보고 싶어 질 무렵 막걸리가 땡기고 누룽지가 고소하다. 갈비를 재운다.
#아들은사랑이다#사랑이라는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