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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에 대한 소회

by 어린왕자

아래층에 물이 샌단다. 사흘 전에 발견했는데 이미 천장 반쯤 물이 침투했고 아래로 타고 흘러내렸다고 한다. 벽지가 흥건하게 젖었고 사방 몇 미터까지 이미 불안이 엄습했으리라. 덜컥 겁이 났다. 물이 새는 걸 알아차렸을 때 아랫집에서 당황했을 모습이 젤 먼저 스쳤다. 예상치 않았던 일이 생긴다는 건 놀라운 일이며 당황스러운 일이며 한편으론 괴로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그때 물벼락을 맞았었다.




아침 운동을 하고 들어와 나른해진 내 몸은 이미 침대 위에 널브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언뜻 잠결에 경쾌하게 오줌 누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들은 소리는 화장실에서 봐야 할 오줌을 냉장고 앞에서 싸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한 소리였다. 저 녀석이 화장실을 놔두고 왠 미친 짓이냐며 눈을 번쩍 떴을 땐 이미 주방이 한강이 된 상태였다. 아차, 큰일이 났구나. 서울살이를 하고 있던 작은 녀석이 전날 내려와 자고 있던 터라 그 녀석이 오줌을 싼다는 말이 안 되는 상상을 잠결인 듯 하고 말았다. 절대 그럴 일 없는 아이지만 잠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눈은 휘둥그레졌고 놀란 가슴은 되돌아올 줄 모르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작은 녀석은 주방에 폭포가 쏟아져도 꿈쩍도 않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가 사태를 설명하자 어린 아기 아빠는 어쩔 줄 몰라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알고 한 것도 아닌데 저도 나도 그냥 미안했다. 오래된 물건이고 집이니 터질 수밖에 없는데도 당장의 불편함에 당황하고 황당한 건 내 몫으로 다가왔다. 집안 전체에 도배를 다시 해야 했고 한겨울 온수를 쓸 수 없었던 위층은 오랫동안 불이 꺼져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더웠고 습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다 내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짜증을 잔뜩 부리며 엉거주춤 섰다가 훅 다가오는 뜨거운 열기에 더 치를 떨었다. 발아래 널브러진 수건이 발가락에 걸려 정신을 놓은 듯 익숙한 씨를 뱉어내고 말았다. 오늘 되는 일이 없다며 스스로를 타박했다. 다급한 손놀림에 화장을 하다가 툭 떨어지는 로션 뚜껑이 방안을 한 바퀴 휘리릭 돌면서 멈추질 않는다. 발로 밟아 멈추게 하려다 둥근 모서리에 보기 좋게 걸리고 발가락 사이가 걸리고 말았다. 저것도 모서리를 지니고 있었구나. 자기를 지키려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구나. 나만 아프고 나만 나만 화가 난 게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혼자 다급했던 스스로가 미안해졌다.


큰방 벽걸이 에어컨을 켰다.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철커덕 환풍기가 돌더니 물기 묻은 머리카락을 스치며 차가운 냉기를 토하듯 뿜어낸다. 화끈거리던 마음이 진정이 되었다. 냉탕과 열탕을 오가던 어떤 인간의 얼굴이 간사해졌다. 그래, 옛말 하나도 그른 게 없지. 덤벙거리다 콧대 꺾인다고. 나를 흘겨봤던 엄마의 순길이 떠올라 씩 거리다 심호흡 크게 내던지고 덕지덕지 화장품을 발라댄다. 익숙한 욕지거리에 화사한 얼굴로 치장하듯 감추는 내 모습이 오늘따라 얄밉다.




큰아들 녀석이 전화를 받았는지 아래층에 물이 샌다고, 엄마가 집에 들어오면 상태를 보러 내려가 보라고 연락이 왔다. 자기가 내려가봤더니 물이 벽지를 타고 흐르고 있더란다. 물이 샌다니 내 맘에 물이 흐르듯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댄다. 뭐부터 해야 하나. 처음 접한 이 상황에 아래층을 먼저 배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누수 잘하는 업체를 먼저 알아봐야 하나. 수도는 그대로 틀어놔야 하나. 핸들을 돌리면서도 이리저리 돌아가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온다.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아래층은 뭐부터 했을까. 물이 새는 벽지를 바라보며 아무도 없는 윗집에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했을 텐데. 도대체 이 집구석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언제 돌아올까 애태우며 애꿎은 현관문을 두드렸을 텐데. 나는 나대로 어디로 얼마나 물이 흐르고 흘렀을까 걱정도 되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일 텐데 당장 가 보지 못하는 마음이 더 급해져 온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래층을 먼저 들렀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선 인기척이 없다. 저녁 열 시가 늦은 건 아닐 텐데 어르신이 일찍 주무시나 보다. 다시 내려가 두세 번 두들기다 반응을 기다렸다 다시 두드리고는 계단으로 걸어 집으로 들어와 신발도 벗지 않고 메모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위층에서 그래도 애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나름 애썼다. 왔다 갑니다,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서 ㆍㆍㆍ썼다 지우길 두어 번 하다가 간단하게 위층 호수만 남기고 왔다. 애쓰고 있다는 위층의 아래층에 대한 작은 위로였다.




집도 건물도 물건도 오래되었으니 낡고 썩어가는 건 당연하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게 묻혀 있는 누수관은 꺼내서 닦고 광낼 수가 없으니 어쩌지 못하는 것 중 하나다. 겉으로 보이는 건 괜찮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때문에 이사를 가려다 그만두기도 했다. 속에 묻힌 관에 때가 끼어도 씻어낼 수 없으니 터져만 준다면 갈아 끼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위층에서 물이 새 우리 집을 새로 고치기 한 지 두어 해가 지났다. 새로고침 할 시기에 옮길까 했으나 그럼에도 이사를 가지 못하고 눌러앉았다. 엊그제 위층으로 인해 아랫집에 피해를 줬으니 물건의 생명이 다해 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조바심을 갖고 또 움직여야 하나 고민이다.


물건도 나도 나이 들어가고 있다. 이래저래 눈치 보고 재다 눌러앉고 말았다. 오래된 것들이지만 함부로 등질 수 없는 안쓰러움인가 보다.


#누수대란#오래된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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