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를 다니던 무렵 아버지는 우리에게 혹시라도 고등학교를 나와 은행에 취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주산을 배워 두라 하셨다. 여자는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이고, 여경도 좋고, 아니면 은행에 취직해도 평생 밥 굶을 일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신조였다. 부기도 배웠다. 부기라는 단어가 자산이나 자본의 증감 따위를 밝히는 기장법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지만 그때는 그냥 내게 숫자로 다가온 수학, 어려운 그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내게 생소함을 넘어 낯설었고 어지러웠고 힘들었다. 그러나 감히 중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배우기엔 버거웠던 주산과 함께 부기를 배웠던 그것이 내 인생 최초의 사교육이었다. 위로 두 살 터울인 오빠도 주산을 배웠고 아래로 두 살 터울인 동생도 함께 주산을 배웠었다. 아버지의 월급에서 항상 고정적으로 지출된 것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재워둬야 하는 쌀값과 연탄값, 그리고 주산 과외비였다.
엄마는 힘들어했다. 동네에선 우리보다 잘 사는 아이들이 주산을 배웠고 우리는 꿈도 꾸면 안 되는 일이었기에 학비 대기도 힘들었고 살림을 꾸리기도 힘들었고 저축을 하기에는 더 힘들었다. 외식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다. 늘 돈이 부족해 힘든 세월 살아내기 빠듯했다. 매일을 싸웠다. 고성이 오가고 밥숟가락이 나뒹굴고 온 집에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한 계절이 다가도록 그칠 줄 몰랐다. 배워서 남 안 준다며 엄마의 성화를 무시하고 꼿꼿하게 대들면서도 아버지는 꼬박꼬박 우리에게 과외비를 쥐어주셨다. 저녁 시간이 지나 과외 선생님이 계실 즈음 우리는 억지로 끌려가듯 공부를 하러 간다.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다. 놀고 있는 친구들 틈에 끼어 놀고 싶고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하얀 쌀밥 실컷 먹고 싶던 날 많았다. 우린 왜 이리 가난에 절어 살아야 하나. 과외비 때문에 싸우는 부모 밑에서도 우리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던 어린 중학생들이었다.
당시 경찰서에 근무하던 동네 언니가 우리의 주산 과외 선생님이었다. 언니는 그 무렵 똑똑한 사람만 간다는 상고를 나와 경찰서에 취직해 뭇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아버지가 바라는 당신 자식들의 모습이길 바랐다. 당신 딸도 저리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배워야 한다고, 여자도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남자만 주로 대학을 보내던, 가난이 등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지고 살았던 시절이었지만 아버지는 남자도 여자도 공부만 잘하면 대학을 보내줄 거라 하셨다. 빚을 내서라도 말이다.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집안일도 자식들에게 시키지 않았지만 식사 시간이 끝나면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씻어야 했다. 그것만은 지키게 했다. 대부분의 집에선 여자가 집안일을 하고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해야 했으나 우리집은 조금 달랐다. 설거지를 해야 하는 일에도 오빠나 동생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가난한 삶을 근근이 이어가면서도 자식들 공부에 대한 집념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자식들은 그 집념을 따라가기 힘들어 여러번 튕겨나갔다 모가지 붙들려 다시 주저앉곤 했다.
주산이라도 잘 배워 두면 인기 직업이었던 은행에 취업할 수 있을 거란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할 말을 잃은 채 꽤 오랜시간을 버티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가야할 때 아버지는 대학을 갈 수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로를 정하셨다. 아마도 당신 자식들이 주산이나 부기 같은 숫자를 계산하는 것을 보니 영 답이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대학을 나와야 밥벌이가 수월하다는 것을 또 아셨던 것이다. 트렌드를 읽을 줄 아셨던 것일까. 붙으라는 돈은 안 붙고 당신이 원하는 고등학교엔 자식들이 척척 붙어줘서 그걸 위안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동네 자랑거리가 되어도 좋았다. 지금은 자식들이 주산을 배운 것으로 직업을 삼진 않았지만 나름 꽤 잘 튕긴다는 자부심은 갖고 있다. 친구들이 잘 못하는 이것도 할 줄 안다, 하는 일종의 쓸데없는 자존심 같은 것이 가끔 솟아나기도 한다. 참 부질없는 일이다. 주산은 꽤 잘 했던 기억은 있는데 부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지금도 수학 잘 하는 친구들 보면 경외스러울 정도로 난 숫자에 약하다. 아버진 그걸 뒤늦게 아셨던 것일까? 물어볼 수가 없다.
과외비도 얼마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당시는 꽤 큰 돈이었다. 생활비에 늘 힘들어하던 엄마를 위해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과외비를 선생님에게 드리는 대신 엄마에게 줬던 기억도 있다. 당연히 과외는 받지 않았다. 과외를 간다고 늦은 저녁 대문을 나섰다가 불꺼진 마을회관 2층 컴컴한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며 추운 저녁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엄마는 일찍 오라 소리도 못했고 늦은 귀가를 하는 자식들을 보며 울음을 삼키기도 하셨다. 가난한 생활이 서러웠고 당신 마음 몰라주는 남편이 원수처럼 미웠고 나아지지 않는 현실이 지긋지긋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정리하다 반질반질하게 반짝이는 주판알에 눈이 멎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사를 한 번 하는 사이 그래도 버리지 않았기에 어느 자리 한 켠 차지하고 있었고 그 사이 어린 내 자식들이 기차처럼 장난감으로 갖고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손때 묻은 책들 속에서 고액 과외로 배웠던 주판이 돈으로 겹쳐 보이며 선뜻 버리지 못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찍어 놓은 사진을 보고 그 시절 같이 놀고 싸웠던 친구가 한 마디 묵직하게 내뱉는다. 우리 아버지는 똥지게 퍼나르면서 주판 배우게 했고, 니네 아버지는 막걸리 휘저으며 판 돈으로 주산 과외비 냈다고. 둘은 아픔을 삼키며 지난 날을 곱씹었다.
"그게 우리의 최초의 사교육이었잖아." 맞다. 박수를 쳤다. 회한이 섞이고 버거웠던 중학생들의 별스런 청춘이 섞였던 추억이다. 오랜만에 모두 만난 고향 친구들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추억을 꺼내다 주산 이야기에 꽂혀 잠시 시선이 집중되었다.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왜냐고 묻는 친구에게 엄마의 생활비로 과외비를 주고 마르고 닳도록 튕겨보지 못하고 들고 다닌 기념비적인 물건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내 아이들이 어릴 때는 주판이 기차가 되고, 철길이 되고, 자동차가 되어 신나게 갖고 논 장난감으로 변신 했었지만 용케도 내 추억 속에 자리잡고 앉아 수많은 세월을 함께 하고 있다. 여린 손가락으로 수없이 올리고내렸던 주판알이 지금도 맨들맨들 콩알처럼 부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