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엄마의 마지막 말들. 박희병 작>은 작가의 어머니가 와병 생활에 들어가시고 세상을 하직하실 때까지의 약 1년 동안 어머니를 돌보면서 어머니의 말들에 대한 작가의 의미 해독에 해당하는 글들이다. 어쩌면 작가 어머니의 사적 이야기가 실존과 사회적 문제의식을 분리하지 않는 일들임에 기인해 인문하적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자식들이 대개 그러하듯 어머니와의 일들은 아주 특별한 존재 관련 속에 있는 것 같다. 어머니의 말들의 맥락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억들의 소환이다. ㅡ책머리에
ㅡ2019년 9월 5일 목요일 오후 여의도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실에서 엄마는 창가의 하늘을 보며 딸에게 묻는다.
비가 오나?
예.
병원에 계시면서도 늘 바깥세상이 궁금하다. 얼마 후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이면 엄마의 이 말이 귓전을 맴돈다.
그날은 구름으로 잔뜩 찌푸린 날이었다. ㅡp13
나의 엄마는 쓰러지신 이후 뇌경색으로 거의 8년을 병원에서 지내셨다. 처음 2년 동안은 당신 집으로 가고 싶다며 매일 내 손을 이끌었다. 여기가 당신 집이에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서 더 빨리 혹여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여 매일 운동을 시켰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엄마와 함께 걷기를 하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점심을 챙겨 먹여드리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그날 하늘에 구름이 꼈는지 바람이 불었는지 하늘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하다.
ㅡ엄마는 유달리 꽃을 좋아하셨다. 수유리 북한산 아래의 집에서 45년을 사셨는데 집에는 꽃이 핀 화분이 늘 있었다. 엄마는 꽃을 보며 환하게 웃으시며 내가 선물한 꽃을 꽃병에 꽂아 식탁에 두셨다.
저기 꽃이네. 예에.
엄마 맞은편 환자의 화병에 꽂힌 꽃을 가리키며 엄마가 하신 말이다. 꽃을 보고 있으면 엄마가 떠오르고, 엄마가 이리 아프신데도 꽃을 보고 좋아하시는 모습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ㅡp15
나의 엄마는 모란꽃을 좋아하셨다. 엄마와 함께 나들이를 가서 모란꽃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기억이 있다. 제법 통통하셨고 제법 건강하셨던 때다.
병원에 계신 후로는 꽃구경을 못 시켜드렸다. 한나절을 병원에서 보내고 나면 오후에 수업을 해야 하는 일정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하루 온종일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일요일 뿐이었으니, 그나마 일요일의 하루도 온전히 엄마를 위한 시간은 아니었다.
꽃 피는 봄을 몇 번 맞았으나 꽃 피는 봄에 엄마를 모시고 꽃구경 시켜드린 적이 별로 없어 지금도 늘 마음이 아프다.
ㅡ병원에 계실 때도 엄마는 아버지 걱정을 자주 하셨다. 늘 함께 다니시던 부부였다. 귀가 약간 어두워진 아버지를 항상 걱정하시고 남의 말 못 알아들을까 봐 같이 다녀야 한다고 늘 가르치셨다.
느그 아버지 밥 차려줐나?
늙은 사랑은 젊은 사랑을 이해할 수 있지만 젊은 사랑은 늙은 사랑을 알기 어렵다. 늙은 사랑을 알지 못하는 한 사랑에 대한 온전하고 깊은 이해에 이르렀다 하기는 어렵다. ㅡp182
나의 엄마는 나를 볼 때마다 엷은 미소로 팔을 구부정하게 흔들며 반갑게 인사한다.
아는 많나? 네.
밥을 먹을 만큼 돈을 벌고 다니냐는 엄마 식의 물음이다. 수업받는 아이들이 적어서 돈벌이가 안 되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을 텐데 당신이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와줄 수 없으니 항상 애가 쓰였던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많으나 적으나 밥 굶지 않을 만큼 많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시킨다.
그날도 두세 명이 두꺼운 책읽기를 그만두었다.
ㅡ 북부병원에 계실 때 맞은편 두 환자를 가리키며 욕 아닌 욕 같은 말을 한 번씩 하셨다. 맞은편 환자들의 모습이 딱하고 서글퍼 보였기 때문이리라. 또한 엄마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조이기도 하셨으리라. 다른 환자들이 곧 엄마의 거울이므로.
꼬라지가 저기 뭐꼬
엄마는 정신이 있고 고개를 들 기력이 있으면 맞은편 환자의 상태와 모습을 관찰하셨다. 이런 행동 때문에 목이 아파 파스를 붙이시고도 그러셨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셨지만 그때도 그러셨다. ㅡp256
나의 엄마는 내가 아는 견지에선 적어도 엄마 자신의 몸은 깔끔하게 꾸미시는 분이다. 냉동고 속은 검은 봉지로 무엇을 넣어 놓으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꾸미고 다니시는 데는 늘 깔끔하셨다.
어이구 저x 꼬라지 보기 싫다. 또 머시요?
병원에 다니러 가면 엄마는 전날 저녁부터 하시고 싶었던 말을 벼르고 계신 듯했다. 옆자리의 저 할망구는 맨날 방귀만 끼고 트림도 하고 당신 말대로 더러버 죽겠다 하셨다. 엄마도 방귀도 뀌고 트림도 하시면서 남이 대놓고 하니 불만이 쌓였던 것이다.
ㅡ동부병원에 계실 때 어떤 완화의료도우미를 보고 불만이 생기면 엄마는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씀하신다. 인지저하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우미가 환히 듣도록 말씀을 하셔서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저거 되게 못땠다
보통 사람도 이런 말을 한다. 단 상대가 안 듣는 데서 하든가 상대가 안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하는데 엄마는 크게 말씀하셔서 내가 놀란 적도 많다.
그러나 그 시간 역시 좋은 시간이었다. ㅡp271
나의 엄마가 병원에 계실 때 혹여라도 엄마에게 불편을 주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걸 미리 막기 위해 병원 관계자에게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챙겨주곤 한다. 도우미에게나 간호사에게나 우리 엄마 좀 잘 봐 달라는 식의 인사다. 베풀지 않아도 또한 그리해 주길 믿는다는 마음에서다.
인자 저거 주지 마라 지는 내 하나도 안 준다.
요구르트 하나를 얻어먹지 못한 날은 엄마도 불만이었던 것 같다. 꼭 먹지 못해서가 아니라 옆의 여자가 '행성머리'가 나쁘다는 것이다. 우리 자식들은 저리 챙겨 주는데 저거는 하나도 안 준다며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셨다. 내가 맞받아친다
왜 하나도 안 주는데.
못된 할마이 같으니라고.
ㅡ9월 여의도성모병원에 계실 때 엄마 상태는 비교적 괜찮았다. 기복은 있었으나 식사도 그럭저럭 하셨고 진통제를 맞지 않아도 되었다. 다행스러웠다. 그러다 10월 아파 누웠을 때 통증이 심해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셨다.
안 아프고 죽어야 될 낀데ㆍㆍㆍ
극심한 통증 없이 죽고 싶으셨던 것이다. 통증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에 그러하다. 엄마의 소원대로 크게 아프지 앓고 숨을 거두셨다. 다행히 진통제를 많이 맞지 않아 최소한의 주체성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ㅡp372
나의 엄마 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길 듣고 응급으로 큰 병원으로 옮겼다. 요양병원에서 움직이는 것보다 내가 먼저 병원에 도착했다.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걸까. 세상에, 이름이 같은 다른 곳으로 갔다지 뭔가. 환자의 기록도 보지 않고 보호자가 위치까지 알려줬는데도 병원에서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그날 엄마의 상태가 심히 걱정되었다.
엄마, 갔다가 저녁에 올게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차 조심해라.
엄마의 마지막 말이었다. 다른 병원을 한 바퀴 돌다가 늦게 도착한 앰뷸런스가 너무 야속하다고 말할 틈도 없이 엄마는 웃으시며 나를 보았다. 엄마는 그날 웃고 계셨다.
운전 조심해라.
만날 때나 헤어질 때나 늘 하시던 말씀.그날 내게 한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 말이 마지막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늦은 저녁 수업을 마치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눈물 대신 한여름의 후텁지근한 바람을 무겁게 들이쉬었다. 엄마와 난 그렇게 헤어졌다.
ㅡ엄마의 죽음의 과정은 삶의 과정과 직결되어 있다. 엄마가 평생 살아온 과정과 방식이 죽어가는 과정과 방식을 결정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늘 해오신 말들을 했고 늘 해오신 걱정들을 했으며 늘 눈을 주곤 했던 대상들에 눈을 주셨다. 엄마 평생의 사랑의 방식은 죽어가는 과정에도 관철되었다.
나는 이 점을 감동적으로 지켜봤다.
엄마를 보내고 나니 바야흐로 초로에 접어든 만큼 이제부터 내가 원하는 죽음의 방식을 골똘히 생각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ㅡ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