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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Nov 07. 2023

한여름 밤의 꿈

장맛비가 거세게 몰아친다.  그러다 잠시 그치는가 싶더니 이내 또 내리친다.  비 맞고 지나다가 꼬꾸라질 정도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드니 걸어 다니는 것은  더 어렵다.   물벼락 맞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아프다.  겨우 차 안으로 들어와 이 못된 녀석을 혼내주고 싶었다.  살살 좀 어지간히 내려라~~  

곳곳에서 수재민이 속출하고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삽시간에 터전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니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닌가.  유독 올해 장마가 더 얄밉다.  


친구에게 전활 걸었다.  어떻냐고.  괜찮단다.  다행인지 아닌지 아직은 괜찮은데 이웃 동네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너무 가슴 아프다고.  연일 폭우로 지하도가 물에 잠기고 물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집이 떠내려가고 도로가 끊기는 뉴스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나도 저도 안타까운 마음만 보태고 있지만 언제까지 한꺼번에 쏟아지려나 또 야속하다.


엊그제 풀을 뽑고 왔다.  엄마의 터전을 갈구하던 내가 풀이라도 뽑아야겠단 마음에 자처했던 일이다.  돌아서면 빈 터에 풀이 자라고 자고 일어나면 자라 있고, 하여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빈 터를 지키지가  쉬운 일이 아니다 싶었다. 풀밭이어도 걱정이고 풀밭이 아니었어도 걱정이었을 터.  엄마가 계셨다면 이 폭우에 엄마 집이 내려앉으면 어쩌랴 걱정했을 것이고 동네 마실 나갔다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어떡할 거냐며 머리끝이 곤두섰을 것이리라. 다행히  걱정 한 스푼 덜고 살고 있다.  


풀을 뽑아 놓은 자리에 그대로 둔 탓에 주변에 빗물이 흥건한 건 아닐까.  빗물에 실려 밀려내려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걸 상상하고 있으니 인도가 마비되어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호출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 된다.  싫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쩌지.  일머리 없는 나를 또 힐책한다.  폭우에 대비 잘하시라는 아파트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들 무슨 소용이랴.  쉼 없이 쏟아지는 폭우에 멍하니 잠시 넋을 잃고 앉아 있다.  수업이 취소된 건 잘된 일이다.


차에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린다. 집에는 빨리 가고 싶은데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런 날은 운전도 무섭다.  차선도 잘 안 보이고 앞 차도 잘 안 보이고 내 맘도 잘 안 보이고.  뉴스를 보려 해도 글자도 잘 안 보인다.  젠장~ 정말 눈에 비~는 게 없다.  깜깜함 그 자체. 움직일까 말까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우스갯소리로 오리가 무중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잠시 나를 돌아본다.  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잠시 쉬고 나면 더 나아질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밥벌이를 바꿔도 볼까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쉬지 않고 달렸다. 남들은 나를  너무 바쁘게 산다고 안타깝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달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으나 나는 그냥 끊임없이  달렸다.  달려서 지금 여기까지 왔다.  돈은?  많이 벌진 못했다.  그러나 쓸 만큼, 눈치 안 보고 명품 구경  실컷 할 수 있는 용기는 덤이고 좋아하는 명품 하나쯤 살 정도는 벌었다.  이만하면 괜찮은 삶 아닌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위로를 얻는다.


명품 생각에 젖다가 비에 젖고 말았다. 베토벤의  음악소리 마냥 우렁찬 빗소리에 그냥 빠져들었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 주어졌다. 더 가야 한다. 인생은 지금부터 란 말이 생겨난 이유를 앎직하다.  일을 쉰다는 자체가 뒤처지는 거라 생각했다.  바보 같은 ×. 그래서 남은 게 뭐냐 묻는다면 ㆍㆍㆍ'글쎄'다.  하루 한 두 타임 정도 수업 쉬는 시간이 이리 고마울 때가 있구나.  인생도 가끔 이리 쉬어가면 덜 힘들겠구나. 내게 잠시 생각할 여유를 준다.  이 폭우가.


이제 집으로 달린다.   폭우도 지쳐 잠시 쉬고 있을 때 그 틈을 타 또 달린다.  비가 붙잡으면 서면 돼지. 잠시 앉았다 가면 되지. 어렵지 않은 걸 예전엔 왜 어려워 못 했을까.  몸이 여유롭다는 건 마음이 여유롭다는 것이다. 비가 좋다는 건 잠시 쉬고 있는 내 삶이 좋다는 것이다.

비를 뚫고 밤길 가는 와중에도 배는 고프다. 엄마의 터전 앞을 지난다. 조용히 그 자리에 잘 있을 테지요.

엄마,  풀 뽑으러 갈 때 또 요.  나 집 가요.

비가 쏟아져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또  먹고는 살아야지요. 그래야 또 엄마를 보지요.

 

ㅡㅡ폭우 내리던 장마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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