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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Nov 08. 2023

5센티미터 구두에 쥐내림을 당하다

상경하는 날 새벽, 젤 걱정된 것이 의상입니다.  친구가 딸을 결혼시키는데 안 갈 수는 없어 서울 구경도 할 겸 흔쾌히 간다고 했습니다.  오랜 친구라도 시간이 맞지 않으면 물론 못 갈 수도 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일요일에 예식을 잡았답니다.  결혼 당사자와 양가의 스케줄이 젤 큰 이유였겠지만 곁가지에 있는 우리로서는 따라야 할 수밖에 없지요.  서울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렙니다.  


토요일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도서관 수업을 하루종일 해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일요일에 잡힌 예식이 금상첨화였죠.  서울 구경도 하고 친구 축하도 해 주고 그럴 요량이었죠. 며칠 전부터 무엇을 입고 갈까 혼자서 고민을 합니다.  재킷이라도 하나 살까, 원피스를 하나 살까, 한 번 입고 안 입는 거 아냐, 입을 게 진짜 없다, 결국 답을 차지 못했습니다. 정답이 없는, 서술형보다 더 찾기  힘든  젤 어려운 문제더라고요.


이미 서너 달 전에 잡힌 일이지만 그간 우리로서는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가오는 날짜만 맞춰 정해진 시간에 나서면 되는 일이니까요.  친구한테 어떻냐고 물어도 멍하니 있답니다.  할 일이 없답니다.  지방에 터를 두고 살고 있으니 서울 사는 녀석 얼굴 보기도 힘들고 결혼식 전날 올라가서 하룻밤 같이 잔다는 일만 남았다고 하네요.  그래도 서운함이 듬뿍 묻어나는 게 들리더라고요.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대소사에 할 일이 참 많아 바쁘셨던 것 같은데 요즘은 돈으로 사고 돈으로 해결하고 전화로 마무리하니 우리네의 맘과 몸은 너무 여유롭습니다.


젤 예쁜 옷을 고르느라 시간을 뺏겨버렸는데 정작 그 옷이 맘에 든 것도 아닙니다.  원피스를 입고 싶었지만  계절에도 맞지 않고 근래 살이 찐 탓에 몸에도 맞지 않았거든요.  새로 사 입기도 어중간해서 투피스로 바지를 입었습니다.  원피스를 입으나 바지를 입으나  키가 좀 커 보이고 싶은 욕심에 7센티미터 구두를 신어봅니다.  자태는 예쁜데 서 있으려면 불편하겠다 싶어 조금 낮은 5센티미터로 결정을 했습니다.  제 아무리 잘 꾸며도 표가 안 난다는 말을 도무지 믿기 싫은 것이 나이 드니 굳어지는 생각입니다.


 촌여자 상경하는 날이 요즘 들어 손에 꼽힙니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서울 갔다 오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갈 일이 생기네요. 봄이면 꽃구경도 하고 여름이면 전시회도 가끔 가고 가을엔 또 창덕궁 후원도 가야 하고 서울 가는 일을 오히려 만들고 있죠.  가끔 보는 친구들이 오늘 모두 차려입어서 그런지 예쁩니다.  원피스 하나 사 입었다며 어떠냐 묻는 친구는 신발을 하나 더 챙겼더군요.  차에선 신발 벗으면 되지 뭘 귀찮게 그러느냐 한마디 던지니 나이 들면 그런 것도 잘 생각 못한다며 또 웃습니다. 나도 원피스 하나 사 입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오더군요. 이쁘다 했더니 거짓말하지 마라며 툭 치네요.  이쁘다 해도 거짓말이라 하고 날씬하다 해도 살쪘다고 하니 어느 장단에 칭찬을 해야 하는지 중년의 판단은 더 어렵습니다. 오고 가는 덕담에 니는 똥배도 없네, 니 똥배는 용서가 돼도 왜 내 똥배는 용서가 안 되는 걸까요.   웃다가 쓰러집니다.


이른 아침길에 배고플까 봐 많이 신경을 썼더라고요.  떡 하나 줄 거야 기대했는데 너무 많은 걸 담아 건네줍니다.  친구의 야무진 성격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주고도 욕 얻어먹지 않게 단단히 준비를 한 거죠.  요구르트는 오래 두면 상할 수 있으니 먼저 한 병을 마십니다. 요구르트 하나에 무리하게 일찍 일어났던 피로가 풀립니다.  


석촌을 돌아볼 여유 시간도 없이 점심을 먹자마자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에 쥐가 따라옵니다.  한 켠에 서서 멎기를 기다리지만 쉽게 쥐가 도망가지 않더라고요.  십 센티도 아니고 겨우 5센티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신음소리만 연거푸 해댔습니다. 구두가  나를 만만하게 여긴 거지요. 나는 구두한테마저도 을입니다.   버스 안에서도 나름 피곤했던지 계속 잠만 잤는데  그날 밤 12시를 넘기지 못하고 곯아떨어졌습니다.  거룩한 날 거룩한 천사의 음성을 들으면서요.  


새벽에 고함을 질렀습니다.  쥐가 왼다리에 먼저 압박을 가하자 뻣뻣해집니다.  돌덩이가 된 다리를 어찌하지 못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쥐 양반이 아직도 내게서 뽑아 먹을 게 남았나요. 왜 나를 힘들게 하나요.  그러자 이젠 오른발을 꾸욱 누르고 꼼짝 못 하게 합니다. 내가 오늘 저에게 한 건 몇 년 만에 서울 구경시켜준 것 밖에 없는데,  그래 한 번 해 보자, 나도 성깔 있다, 버텨봅니다.



노래 가삿말이 위로가 될까요?  다리를 부여잡고 구두를 보며 한탄합니다.

  '이제 다시 너를 찾지 않으리, 두 번 다시 너를 찾지 않으리.'


 청춘일 때는 저보다 더 높은 구두를 신고 뛰어도 다녔는데ㆍㆍㆍ. 이제는 반으로 낮춘 구두를 신고도 이겨내질 못합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데 지고도 차라리 웃음이 납니다. 내게 남은 건 5센티미터 굽높이로 인해 쥐내림에 잠식당한 그날 밤의 굴욕이었습니다. 슬프지도 않습니다.  나만 아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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