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생각해 볼 나이
궂은비 내리는 날 아니, 햇살 맑은 날 그야말로 오래된 아파트의 베란다 창가에 캠핑용 의자를 세팅해 앉아 각도 15도의 시선을 내리깔아 꽂힌 곳에 덩그러니 꽃 한 송이 피어 있는 걸 보았다. 그곳에 앉을 땐 꽃보다 커피다. 커피 한 잔을 손끝으로 우아하게 들고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멍하니 있는 것이 좋다. 꽃은 꽃대로 피어 있으면 분위기는 더 좋다. 내가 가꾸고 물 주고 그만큼 자란 것에 뿌듯해하며 만족한다.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터에 그렇게 자라나고 있었다.
사실 알고 보면 그이도 우아한 종족이다.
우아한 종족이면 그답게 우아한 자태를 뽐내야 하는데 그걸 바라보는 사람은 아쉽게도 없다. 매일 이 집 사람들은 바쁘게 산다. 혹여 꽃 한 송이 핀 걸 보고 나만 으스대며 깜짝 놀란다. 해마다 피고 지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한다. 사실 관심도 없다. 우아한 종족도 우아한 종족이 알아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도라지 위스키 한 잔 대신 달콤한 맛 나는 봉하 막걸리 한 잔으로 삼십 년 묵은 짙은 먼지를 날려본다. 덕지덕지 앉은 때가 쉽사리 벗겨질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눌어붙은 더께가 조금 일어날까 도수 낮은 안경을 벗고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썩은 먼지를 한 꺼풀 걷어낸다. 스르륵 벗겨지는 해묵은 때가 가슴을 짓누른다. 저것들이 내 삶의 흔적들일까, 내가 꾹 눌러온 세월의 잔해들일까 애써 외면하고 싶은 무게다. 삐꺼덕거리는 창틀의 맞지 않은 돌쩌귀처럼 내 인생도 어쩌면 아귀가 맞혀지지 않은 억겁의 세월이 묻었으리라.
꽃을 보다가 세월에 짓눌린 더께를 더 깊이 보고 말았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달콤함이야 없을지라도 그래도 지나온 청춘은 아름다웠다. 청춘이 아름다웠기에 지금이 살 만하다 말하고 싶다.
낭만은 어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