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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Jan 14. 2024

강아지 목줄은 메셔야죠

그것도 두 마리씩이나

햇볕 잘 내리쬐는 시간을 택해 아파트를 돌며 운동하기로 했다. 햇볕이 있긴 하지만 바람은 세게 불지 않아도 겨울이라  공기는 차다. 얼굴에 닿는 공기의 감촉이 차다 못해 아프다. 겨울엔 걷지 않으려 별의별 핑계를 다 댄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끼고 장갑을 껴도 겨울 자체가 아프고 싫다. 걷기는 나 좋아라 하는 건데 괜스런 핑계로 새해 한 달을 벌써 반을 넘기고 있다.  올 한 해 목표는 소박하게 2킬로그램 감량이다. 살을 빼는 것보다 찌우는 게 훨씬 쉬운 일이란 걸 알지만 지금까지의 내 삶에 처음 맞는 다이어트를 올 한 해는 꼭 성공해 보리라 했다.  


내 앞에서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운동 나온 아저씨가  털레털레 걸어온다.  운동할 때마다 보게 되는 늘 있는 일이다. 그 옆을 강아지 두 마리가 목줄도 없이 태평스레 따라 뛴다. 왜 목줄도 없이 데리고 다니는 거야,  에티켓도 없이. 어린 강아지여도 목줄 메고 다녀야지. 혼잣말처럼 되뇌다  한 바퀴를 돌고 또 마주칠 때는 내  기분이 상당히 나빠 있었다. 목줄 없이 날뛰는 강아지 옆을 지나면서도 속에 있는 말이 뱉어지지 않았다.  싸움이라도 나면 내가 질 것 같으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싸움이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거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말해도 상대가 화부터 내면 나는 어찌 되는 건가.  한 바퀴를 더 돌 때까지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아프기만 하다.  내가 다른 데로 가면 될까.  


인도에 사람 한 명과 강아지 두 마리가 함께 걸으면 꽉 찬다.  나는 일부러 강아지 앞을 막아서듯 걸었다.  내 갈 길을 분명 가겠다는 것이다.  강아지가 지나가도록 한쪽으로 내가 비켜서지 않겠다는 뜻이다.  맞닥뜨렸을 때 그 아저씨도 강아지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싸가지가 없구만, 그렇다면 내가 굳이 저 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  강아지  한 마리가 삐쭉 주인 곁으로 물러섰다. 아저씨는 눈치도 없다. 지나치는 행인이 그 정도로 제스처를 했다면  강아지를 막아서야 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니 더 짜증이 확  났다. 좋은 날 아침에 좋은 마음으로 햇살 맞은 기분이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한 바퀴를 더 돌아왔을 때 예의 없는 그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눈치를 채고 들어갔구나 하면서 기분 좋게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솔솔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아, 이런.  이건 또 무슨 낭패냐. 아파트 정원에서 젊은 남자가 연거푸 담배를 빨아내며 가래 섞인 기침을 해댄다. 목줄 메지 않은 강아지보다 더 참기 힘들다. 숨을 참으면 참을수록 견디기가 더 힘들다. 자기 집에서 피우면 될 것을 왜 밖에 나와 피워 아무 죄 없는 다수를 힘들게 하는 건가 또 분노가 스멀스멀 용솟음쳤다. 내가 왜 뭔지 알 수도 없는 악취를 맡아야 하나. 불쾌했다. 햇빛은 그 자체로 좋은데 햇빛의 순수함을 담배 연기가 흠집을 내고야 말았다.


담배 연기가 흩날리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북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간간이 횡단보도를 건너려 뛰어가는 사람들 옆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하필 그 바람이 담배 연기를 머금고 오는 건 또 뭐람. 뛰다시피 도망치듯 몇 발자국을 걷다 아, 내가 왜 이런 불쾌함까지 느껴가며 운동을 해야 할까 싶었다.  6개월에 얼마 하는 피트니스를 같이 가자고 조르는 아들 따라 피트니스를 계약해? 차라리 그 돈으로 소고기 사 먹으련다 했던 나의 악바리 정신이 수그러드나? 해결도 나지 않는 질 물을 혼자 해 가며 돌아섰을 때 모퉁이에 앉아 귤을 까는 아주머니가 한 박스 사 가라며 말을 건넌다.


ㅡ고구마 한 다라이 사세요.

발간색 고무 다라이에 담긴 양파에 눈이 갔는데 헐렁하게 옷을 챙겨 입은 아주머니 사이로 바람이 쓸고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아주머니가 흘낏 쳐다본다.

ㅡ고구마 맛있겠다.

가지런하게 놓인 고구마 박스 위로 양파, 대파, 귤 등이 주인을 기다리고 떨고 있다. 마음 같아서 고구마 한 박스 사 주고 싶은데 사실 고구마를 먹을 식구가 없다. 두고두고 먹어도 되지만 뒷베란다에서 쪼그라진 채로 한 두 번 버려지는 고구마가 늘 마음에 걸렸던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이 크고 나니 영양 간식도 먹지 많게 된다.  편하고 빠른 햄버거가 오히려 구미에 맞아 전화 한 통이면 수고로움 없이도 빨리  허기를 면할 수 있다. 오늘 저녁엔 햄버거 하나 먹어 볼까.  


ㅡ고구마 한 다라이 사 가세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주머니는 곁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듯 툭 던진다. 몇 바퀴를 돌고 돌아왔는데도 아무도 사 간 흔적이 없이 그대로다. 나는 벌써 네 번이나 들었다. 현금  만 원만 있었으면 한 다라이 사 줄 기세다. 먹다가 남겨 버릴지언정.  아주머니는 이윽고 뻐끗해진 허리를 곧추세우며 기지개를 켠다. 행여나 그 사이 손님이라도 올까 자리를 비우지도 못하고 선 채로 팔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한 바퀴를 돌아오니 손님을 맞고 있다. 손님을 보니 아무도 아닌 내가 더 반가웠다.  아주머니는 오늘 마음 편하게 자리를 파하시겠다.


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쯤 어딘지 익숙한 아저씨가 걸어온다.  누구지? 아, 강아지 아저씨, 그런데 강아지가 없다. 아까 보이지 않더니 강아지를 데려다 놓고 나오셨구나.  그럼 그렇지, 아무리 작은 강아지라도 밖에 데리고 나올 때는 목줄을 메고 나오셔야죠.  

ㅡ우리 개는 안 물어요.

흔히 강아지 주인들이 하는 소리다. 아니, 나는 그 강아지가 물지 않아도 무섭던데요. 당신들 주인한테나 물지 않을까. 어찌 알아요, 상대방은 물릴지  모르는 두려움을 갖고 있잖아요. 강아지가 안 보여도 아저씨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곱지 않다. 그럼에도 낼부터 목줄 메고 다니시라는 말 못 하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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