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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Nov 10. 2024

합격, 그리고 상경

시작의 감정은 설렘일까, 두려움일까

  길고 힘든 수험생활이 끝나고, 평화롭지만 게으르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권태로운 일상이었다. 재수를 하는 동안 이를 악물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밤을 새우며 드라마를 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논술고사 결과를 전부 확인했지만, 예비 2번을 받은 한 학교의 경찰행정학부를 제외하고 전부 탈락이었다. 그래도 딱히 상심하거나 슬프진 않았다. 예상보다 수능 성적이 잘 나왔고 정시로도 목표했던 것 이상의 학교들에 지원할 수 있었으니까. 수능을 다시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최선을 다했고, 과정에 만족했으며 스스로에게 당당한 1년이었기에 그 결과를 겸허히,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전공으로는 사범대와 심리학과를 고려하고 있었다. 사람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사람을 위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x사 프로그램을 몇 번 돌려보고, 다시 드라마를 틀며 시간을 때우다 보니 추가합격자 발표일이 훌쩍 다가왔다.


  시간은 새벽 2시 반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비번호를 받은 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가자, 합격자 조회 창이 떠 있었다. 하지만 논술은 예비로 추가합격을 받는 비율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별로 기대를 걸진 않고 수험번호를 입력했다. 빨간 글자로 무엇인가 쓰여있었다. 휴대폰으로 확인한 탓에 잘 보이지 않아 화면을 확대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처음 3초 정도는 실감이 나지 않았고, 그다음은 혹시나 전산오류인가 싶어 수험번호를 다시 입력해 보았다. 미칠 듯이 신나고 기쁘진 않았지만, 잔잔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성취감이었다. 자고 있는 누나를 깨웠다. “누나, 나 합격했어.” “... 진짜? 잘했네 동생..”누나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가벼운 축하를 전했다. 그대로 밤을 새워버렸다. 혼자 가볍게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하는 아버지에게 합격 사실을 말씀드리자 그분의 얼굴에서 밝은 웃음과 자랑스러움을 볼 수 있었다. 긴 수험생활 동안 마음고생을 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테다.


  기쁨도 잠시, 입학 전까지 지루한 일상은 계속되었다. 새로운 취미를 찾는 동시에 입학을 준비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동네 상가 지하에 있던 주짓수 도장에 등록했다. 좋은 취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너무 작고 약했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첫 일주일은 어색하고 잔부상도 많았지만 나름 즐거웠다. 동시에 학교에 대해 이것저것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의 필수 어플 에브리타임에 가입하자 나처럼 신난 새내기들의 글이 쏟아졌고, 다양한 홍보글들도 눈에 들어왔다. 마음만은 벌써 서울에 가 있는 것만 같았다. 새 노트북을 장만하고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새삼 서울의 집값이 비싸다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내 대학생활의 목표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절대로 누구와도 친분을 쌓지 않고 공부와 운동에만 집중하자.’ 수험생활은 끝났음에도 나는 못나고 뒤처진 사람이라는 불안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오랜 가정의 불화와 고교 시절 경험한 따돌림과 배신의 상처가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삶은 절대 내 계획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2월 끝자락의 날씨가 추웠던 어느 날, 나는 서울에 도착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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