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초여름의 날씨는 꽤나 더웠다. 그럼에도 술 기운 탓인지 한기가 내 목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당시 친한 동기이자 함께 학과생활을 해왔던 지현 누나가 따라나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힘들어?” 마치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누나가 물었다. ”모르겠어. H가 날 왜 피하는건지, 걔 진심이 뭔지도. 그런데 이대로는 못 지내겠어.“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나갔다. ”누나, 나 전화 한 통만 할게.“
설렘은 불안에 잡아먹혔고, H와의 위태로운 관계가 깨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나는 끝을 목격하기도 전에 침울함에 빠졌다. 그럼에도 나는 말해야했다. 내 진심을, 온 마음을 다하는 와중에 천천히 무너진 내 진심을. “왜 요즘따라 나를 피해?” 따지기보다는 부탁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냥. 남들이 오빠랑 나를 엮는 게 조금 불편해져서. 신경쓰여서 그랬어.” “난 너가 이유없이 갑자기 날 피하는 게 당황스럽고 싫었어. 나는..” 틀어막고 있던 눈물이 눈가를 비집고 나왔다. H가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거야?” “나는 널 좋아해. 애매하게 하고 싶지 않아. 너랑 사귀고 싶어.” 최악의 고백이었다.
맨정신이었다고는 해도 술에 취한채로, 부담스러움을 돌려 말하는 상대에게 투정부리듯 내뱉은 그런 고백이었다. 그러나, 맑고 투명한 진심이었다. “..미안. 나는 그동안 안정적인 연애를 해 본 적이 없고, 이런 상황에서 오빠를 만났다가 헤어지게 된다면, 친구로도 남지 못할 것 같아.” 알고 있었다. 무슨 대답일지, 그리고 내가 감당해야 할 상처의 크기가 얼마나 클지. 그러나 직접 거절의 대답을 들었을 때, 그건 마치 가슴에 구멍이 나는 기분이었다.
전화를 끊지 못한 채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텅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잠시 품었었다. 그때는 모든 게 나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더 일찍 마음을 전했더라면 어땠을까.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너를 내 안에 들이지 말아야 했을까.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오는 나를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정현이가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날따라 우중충한 집이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나는 얕은 잠에 빠졌다. 다시 시작된 우울에서 허덕이듯이 뒤척거리며, 가슴을 부여잡고 침대에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