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질 즈음에는
술에 찌든 속이 쓰려오는 불쾌한 느낌과 함께 부스스한 머리를 부여잡고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가 중천이었지만 가뜩이나 북향인데다 커튼까지 쳐놓은 4평짜리 방은 그날따라 어둡고 음침했다. 어제의 일이 떠오르자 기분은 어질러진 방보다 더 심란해졌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지현 누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딱히 알려지길 원하지도 않았다. 피차 서로 피곤해질 뿐이라고 생각했고, 이미 까인 마당에 H에게 곤란한 상황을 더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평소와 같이 적당히 옷을 차려입고 강의실로 갔다. 멍한 느낌에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익숙한 고통이었다. 거절과 상실. 그것들은 도무지 내 삶에서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싫은 기분에 학교 근처의 거리를 서성이다가 한 카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여과대를 맡고 있던 동기 서윤이랑 만났다. “뭐야, 너 누구 만나러 가지. 왜 꾸미고 왔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기분전환...인대 넌 왜 여기에 있냐?” 나와는 달리 늘 그렇듯 편한 차림의 서윤이는 노트북을 펴두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냥, 심심해서. 근데 딱히 할 건 없네.“ 서윤은 잠시 휴대폰을 보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야 s대 축제 갈래? 오늘이라는데 기리보이 온대!” 마침 스트레스를 풀 겸 어딘가 놀러가고 싶었던 나는 서윤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우리는 학과 사담방에서 함께 갈 동기들을 구했다. 물론 서윤이를 통해서. 내가 함께인 걸 몰랐던 건지, 알고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건지 도합 10명이 조금 넘는 인원 중에는 H도 있었다.